[별세개반이상만 #46] <니캡>
<니캡>의 주인공들은 스스로를 '휴전 세대(Ceasefire Babies)'라고 부릅니다. 이는 1998년 '굿 프라이데이' 협정 전후로 태어나 북아일랜드 무력 분쟁의 직접적 폭력을 경험하지 않고 자란 세대를 가리키죠. 30년간 지속된 북아일랜드 분쟁을 공식 종료시킨 이 협정으로 아일랜드 통일을 꿈꾸는 공화주의자(IRA)와 영국 잔류를 원하는 연합주의자(UDA), 그리고 영국 정부 간의 무력 충돌이 마무리됐습니다.
폭탄 테러와 총격전이 일상이던 벨파스트에 평화가 찾아왔지만, 이들은 여전히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방황하는 세대죠. '니시'(모 차라)와 '리암'(모글리 밥)은 마약과 술에 빠져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는 전형적인 북아일랜드 청년들입니다. 할아버지는 독립투사였고, 아버지는 IRA 전사였지만, 정작 자신들에게는 싸울 이유도, 꿈도 없어 보이죠. '니시'의 아버지 '아를로'(마이클 패스벤더)는 영국 당국을 피해 죽은 척하고 10년째 숨어 살고 있는데요.
아들에게 "모든 아일랜드어 단어는 아일랜드 자유를 위한 총알"이라고 가르쳤지만, 정작 '아를로' 자신은 요가 강사로 위장한 채 '보비 샌들'이라는 조롱 섞인 별명으로 불립니다. 과거 <헝거>(2008년)에서 단식투쟁의 영웅 '보비 샌즈'를 연기했던 마이클 패스벤더가 이제는 한물간 혁명가를 연기한다는 설정 자체가 씁쓸한 아이러니죠.
우연한 기회로 경찰서에서 만난 음악 교사 'JJ'(DJ 프로비)는 '리암'의 노트에 적힌 아일랜드어 가사의 가능성을 발견하는데요. 전통적인 방식으로 아일랜드어를 가르치며 회의감에 빠져있던 그에게, 이 두 청년의 거친 언어는 새로운 돌파구가 됩니다.
세 사람이 만나 결성한 그룹명 '니캡(Kneecap)'에는 이중적 의미가 담겨있는데요. 표면적으로는 북아일랜드에서 공화주의 무장단체들이 마약딜러나 범죄자들에게 가하던 무릎 총격 처벌인 '니캐핑(kneecapping)'을 가리키죠. 하지만 동시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뜻의 아일랜드어 "ní cheapaim(니 헤파임)"과 발음이 비슷한 언어유희이기도 합니다. 모글리 밥은 "니캐핑을 당할 만한 일들을 노래하는 그룹이 니캡이라는 이름을 쓴다는 것이 의도적인 아이러니"라고 말했죠.
니캡의 음악이 인기를 끌면서 이들은 예상치 못한 논란의 중심에 섭니다. 아일랜드어 보존 운동가들은 이들이 '성스러운 언어'를 더럽힌다며 분노하고, 영국 당국과 친영 세력들은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두려워하죠. 심지어 급진 공화주의 단체 'RRAD'까지 나서서 이들을 위협합니다. 모든 기성세대가 이들을 적으로 돌린 셈인데요. 하지만 정작 젊은 세대들은 니캡의 음악에 열광하죠. 아일랜드어로 마약과 섹스, 정치적 분노를 표현하는 이들의 가사는 기존의 전통 민요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언어 경험을 제공했습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멤버들의 투어 공연인데요. '점령된 여섯 지방'이라는 투어 이름 자체가 북아일랜드의 정치적 현실을 정면으로 건드리는 도발이었죠. 무대에서 'RRAD'의 협박 녹음을 공개하며 기성 권력에 맞서는 장면은 'N.W.A'의 전설적인 'Fuck Tha Police' 공연을 연상시키죠. 실제로 리치 페피아트 감독은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2015년)의 명장면을 의도적으로 오마주했다고 밝혔습니다.
흥미롭게도 <니캡>의 감독 리치 페피아트는 영국인이죠. 아일랜드어를 전혀 구사하지 못하는 그가 아일랜드의 가장 민감한 주제를 다룬다는 것 자체가 모순처럼 보이는데요. 하지만 바로 이 '외부자의 시선'이 영화의 강점이 됐습니다. 페피아트 감독은 니캡의 뮤직비디오 'Guilty Conscience'를 연출하며 이들과 인연을 맺었고, 그 과정에서 이들의 이야기가 가진 보편적 가치를 발견했다고 하죠.
문화적 억압과 언어의 소멸이라는 주제는 전 세계적인 문제라고 생각한 감독은 제작 과정에서 니캡 멤버들과 긴밀하게 협력하여 각본을 공동 집필했습니다. 실제 인물들이 본인을 연기한다는 설정은 위험한 도박이었지만, 비전문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와 마이클 패스벤더, 시모네 커비 같은 숙련된 배우들의 조화가 놀라운 시너지를 만들어냈죠.
인상적인 것은 음악 시퀀스의 연출인데요. 니캡의 실제 공연 영상을 활용하면서도 영화적 서사와 자연스럽게 결합한 편집은 가히 예술적입니다. 관객들이 니캡의 음악에 열광하는 장면들은 단순히 공연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언어 부활의 순간을 포착한 역사적 증언처럼 느껴지죠. 마약 사용 장면의 처리도 주목할 만합니다. 감독은 마약을 미화하지도, 도덕적으로 단죄하지도 않죠. 대신 그것을 이들 세대의 현실이자, 기성세대가 만든 절망적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 제시합니다.
그렇게 <니캡>을 보고 나면 한 가지 확신이 드는데요. 21세기의 독립투쟁은 총이나 폭탄이 아닌 문화와 예술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세 사람이 창고에서 만든 아일랜드어 힙합은 어떤 정치적 선언보다도 강력한 무기가 됐죠. 이들의 음악을 듣고 아일랜드어를 배우기 시작한 전 세계 젊은이들의 수가 그 증거인데요. 억압받던 언어가 힙합 비트를 타고 부활하는 순간, 정말로 역사는 다시 쓰이고 있습니다. ★★★☆
※ 영화 리뷰
- 제목 : <니캡> (Kneecap, 2024)
- 개봉일 : 2025. 06. 18.
- 제작국 : 아일랜드, 영국
- 러닝타임 : 105분
- 장르 : 코미디
-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 감독 : 리치 페피아트
- 출연 : 모 차라, 모글리 밥, DJ 프로비, 마이클 패스벤더, 시모네 커비 등
- 화면비율 : 1.85: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