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나오는 영화인데 어른이 더 뜨끔했습니다

[별세개반이상만 #49] <여름이 지나가면>

by 양미르 에디터

어딘가에는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를 기교 없이 전달하는 힘이 매섭습니다. 장병기 감독의 장편 데뷔작 <여름이 지나가면>을 보고 난 후, 머릿속에 맴도는 것은 화려한 영상미도, 극적인 반전도 아니었는데요. 그저 우리 주변 어딘가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을 법한 이야기가 주는 묵직한 울림이었죠. 이 영화가 가진 가장 큰 힘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일상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사회의 민낯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것 말이죠.

진학을 위해 서울에서 소도시로 이사 온 초등학생 '기준'(이재준)의 이야기는 너무나 평범한데요. 농어촌 특별전형 혜택을 노린 엄마의 계산적 선택, 새 학교 적응을 위해 애쓰는 아이의 모습,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낯선 세계. 모든 것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입니다. 하지만 '기준'이 전학 첫날 운동화를 도난당하면서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죠.

4489_3853_5821.jpg 사진 = 영화 '여름이 지나가면' ⓒ (주)엣나인필름

모든 의심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동네의 문제아로 낙인찍힌 '영문'(최현진)과 '영준'(최우록) 형제인데요. 부모 없이 단둘이 살아가는 이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동정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경계의 대상이죠. '기준'의 엄마 역시 "네가 저 애들하고 같은 줄 알아?"라며 선을 긋습니다. 그런데 '기준'은 점점 이 형제들에게 매력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영문'이 보여주는 압도적인 힘,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권력의 맛을 경험하게 된 것이죠.


'영문'이 다른 아이에게서 돈을 갈취하는 것을 보고도, 자신을 괴롭힌 아이를 '영문'이 대신 응징해 주는 것을 보고도, '기준'은 이들의 세계에 더욱 깊이 발을 들여놓습니다. 장병기 감독이 연출 의도에서 밝힌 "사랑을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란 어떤 모습일지 그려보고 싶었다"라는 말은 이 영화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인데요. 감독은 단순히 문제아들의 일탈을 그리려던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감정을 학습할 기회를 박탈당한 아이들이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살아가는지를 탐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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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과 '영준' 형제에게 돈, 가족, 친구, 선생님의 개념은 '기준'이 이해하는 것과 전혀 다르죠. '기준'이 부모에게 수없이 물어보며 자연스럽게 터득한 세상의 질서를, 이들은 스스로 만들어가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형성된 그들만의 생존 방식은 '기준'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되죠.

특히 장병기 감독이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넘어가는 시기를 배경으로 선택한 것은 의미심장한데요. "오롯이 자신이 혼자 판단하게 되는 시기"라는 감독의 설명처럼, 이 나이의 아이들은 부모의 보호막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자율적 판단을 하게 되죠. 하지만 어른들 눈에는 여전히 어린 애로만 보이기 때문에, 그들의 복잡한 내면은 종종 간과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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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지나가면>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은 바로 '기교 없음'에 있는데요. 장병기 감독은 인위적인 감정 조작이나 과도한 연출 없이, 담담하게 현실을 관찰하는 시선을 유지하죠. 그 결과 관객은 마치 실제 상황을 목격하는 듯한 생생함을 느끼게 됩니다.

영화의 핵심 질문인 "우리는 정말 다른 세상에 사는 걸까?"는 관객 각자에게 다른 방식으로 다가오는데요. '기준'과 '영문' 형제가 물리적으로는 같은 공간에 살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삶의 조건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영화는 차분히 보여주죠. 이 영화가 단순히 계급 갈등이나 사회적 불평등을 고발하는 데 머물지 않는 이유는, 그 차이를 극복하려는 아이들의 순수한 시도를 따뜻하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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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이 '영문'의 세계에 진입하려 하고, '영문'이 '기준'에게 플레이스테이션을 새로 사주려 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를 이해하려는 진실한 노력을 볼 수 있죠. 영화 제목인 <여름이 지나가면>은 시간의 흐름을 의미하는 동시에, 지나가지 않는 어떤 것에 대한 은유이기도 합니다. '기준'에게 그 여름은 일시적인 경험으로 기억될 수 있지만, '영문'과 '영준'에게는 계속해서 반복될 일상이죠. 관객들이 영화관을 나서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오토바이 소리처럼,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

2025/06/25 CGV 용산아이파크몰

※ 영화 리뷰
- 제목 : <여름이 지나가면> (When This Summer is Over, 2025)
- 개봉일 : 2025. 07. 09.
- 제작국 : 한국
- 러닝타임 : 114분
- 장르 : 드라마
-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장병기
- 출연 : 이재준, 최현진, 최우록, 정준, 고서희 등
- 화면비율 : 1.85: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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