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코니에서 시작된 세 여자의 잔혹하고 유쾌한 해방기

[별세개반이상만 #49] <발코니의 여자들>

by 양미르 에디터


마르세유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 세 여성이 발코니에 모여듭니다. 찜통 같은 더위는 억압된 감정들을 끓어오르게 하는 촉매이자, 기존의 질서를 녹여버리는 용광로죠. 소설가가 되고 싶으나 세상이 두려워 발코니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내성적인 '니콜'(산다 코드레아누), 자신의 몸을 주체적으로 활용하며 캠걸로 살아가는 자유분방한 '루비'(수일라 야쿠브), 그리고 억압적인 남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친구들을 찾아온 배우 '엘리즈'(노에미 메를랑).

이들은 각자 다른 이유로 상처받았지만, 함께 모였을 때만큼은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죠. <발코니의 여자들>은 이들이 맞은편 아파트에 사는 매력적인 사진작가 '마냐니'(루카스 브라보)를 관찰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니콜'의 짝사랑 상대이기도 한 그는 어느 날 세 여성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죠. 하지만 술과 음악이 흐르는 파티의 끝에서 참혹한 현실이 드러나는데요.

4495_3882_5520.jpg 사진 = 영화 '발코니의 여자들' ⓒ 그린나래미디어(주)

'마냐니'가 '루비'를 성폭행하려 하고, 이를 막으려던 과정에서 그는 죽음에 이릅니다. 순식간에 세 여성은 시체를 처리하고 범죄 현장을 정리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데요. 이때부터 영화는 완전히 다른 얼굴을 드러내죠. 달콤함은 사라지고, 서스펜스와 호러, 그리고 초현실적 판타지가 뒤섞인 장르의 경계선에서 춤추기 시작합니다.


죽은 '마냐니'는 유령이 되어 '니콜'을 괴롭히죠. 이 유령의 출현은 여성들이 일상에서 마주하는 남성들의 시선과 폭력이 얼마나 끈질기고 지속적인지를 상징합니다. 현실에서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 가부장제의 그림자, 피해자를 괴롭히며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가해자들의 모습이 바로 이 유령의 정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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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만이 이 유령을 볼 수 있다는 설정도 의미심장한데요. 작가인 '니콜'은 언어로 세상을 재구성하려는 사람이죠. 그래서 '니콜'에게만 보이는 유령은 아직 언어화되지 못한 트라우마, 아직 이야기되지 못한 진실들을 의미합니다. '니콜'이 온라인 창작 수업에서 기존의 서사 구조에 의문을 제기하는 모습은 노에미 메를랑 감독 자신의 창작 철학과 겹치는데요. 감독은 인터뷰에서 "남성적 시선, 대상화된 여성, '신비로운 여성' 같은 코드들을 가지고 놀고 싶었다"라며, "전통적인 내러티브 장치들을 비틀어 보려는 시도"였다라고 밝혔습니다.

<발코니의 여자들>에서 가장 도발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순간들은 여성들이 옷을 벗는 장면들이죠. '루비'가 상의를 벗고 발코니에 나가는 것은 사회적 규범에 대한 선언입니다. "그냥 가슴인데, 뭐. 그냥 가슴이에요"라는 '루비'의 대사는 여성의 몸을 성적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직격탄이죠. 영화의 후반부, '엘리즈'가 셔츠를 열어젖힌 채 대낮의 거리를 당당하게 걷는 모습은 가장 강렬한 해방의 이미지인데요. 그 순간 '엘리즈'는 마침내 숨을 쉴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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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에미 메를랑 감독은 마릴린 먼로라는 아이콘을 통해 이러한 메시지를 더욱 명확하게 전달하죠. '엘리즈'가 처음 등장할 때의 마릴린 먼로 분장은 남성의 욕망으로 만들어진 완벽한 여성상을 상징하는데요. 하지만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서 '엘리즈'는 점차 그 가면을 벗어던지죠.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년)에서 보여준 절제된 연기와는 완전히 다른 에너지를 뿜어내며, 노에미 메를랑은 감독으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과감하게 드러내는데요. 감독은 셀린 시아마와의 공동 각본 작업을 통해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보편적 이야기로 승화시켰죠. 17세에 모델 활동을 시작하며 겪었던 사진작가의 폭력, 교제폭력의 경험들이 이 영화의 출발점이었다고 밝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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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할 점은 감독이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코미디 장르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인데요.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데에는 코미디 장르가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라는 감독의 말처럼, 웃음은 이 영화에서 방어 기제이자 거리를 두는 전략으로 작동하죠. 시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세 여성이 보여주는 유쾌함은 현실에서 경험할 수 없는 복수의 판타지를 관객들에게 선사합니다.

한편, 현실에서는 좀처럼 처벌받지 않는 가해자들은 영화 속에서는 마땅한 대가를 치르는데요. 이것이 바로 <발코니의 여자들>이 선사하는 가장 큰 쾌감이죠. 감독이 참고했다고 밝힌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2003년), 나홍진의 <추격자>(2008년), <곡성>(2016년) 등 한국 스릴러의 영향은 영화 후반부의 긴장감 있는 전개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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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발코니의 여자들>의 진짜 힘은 복수에 있지 않고 연대에 있는데요. 서로 다른 배경과 성격을 가진 세 여성이 위기 속에서 더욱 견고해지는 우정, 그리고 그 우정을 통해 각자의 트라우마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야말로 이 영화의 진정한 메시지죠. 이는 여성의 경험이 특수한 것이 아닌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세 여성이 함께 자유를 향한 여정을 시작하는 모습은 희망적인데요. 그들은 더 이상 발코니에 갇혀 세상을 훔쳐보는 존재가 아니었죠. 당당하게 세상 밖으로 나가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써나가는 주체가 되었습니다. 그 여정의 끝에서 우리가 만나게 될 새로운 서사는 어떤 모습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기존의 영화 문법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언어로 쓰여진 이야기일 것입니다. ★★★☆

2025/05/02 메가박스 전주객사
-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JIFF) 상영작


※ 영화 리뷰
- 제목 : <발코니의 여자들> (The Balconettes, 2024)
- 개봉일 : 2025. 07. 09.
- 제작국 : 프랑스
- 러닝타임 : 104분
- 장르 : 코미디, 범죄
-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 감독 : 노에미 메를랑
- 출연 : 노에미 메를랑, 수일랴 야쿠브, 산다 코드레아누, 루카스 브라보, 나디지 비우슨-디아그네 등
- 화면비율 : 1.85: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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