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세개반이상만 #51] <미세리코르디아>
※ 영화 '미세리코르디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세리코르디아>의 알랭 기로디 감독은 "내가 관심 있는 영화는 세상을 흔드는 영화다. 이번에는 죄책감, 후회, 용서, 사랑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며 도덕규범들을 뒤흔들기로 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의 의도는 성공했는데,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말문이 막혔기 때문이죠.
영화는 '제레미'(펠릭스 키실)가 10년 만에 고향 마을로 돌아오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과거 일했던 빵집 사장 '장 피에르'(세르주 리샤르)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죠. 미망인 '마르틴'(카트린 프로)은 그를 반갑게 맞아주고 집에 머물기를 권하지만, 아들 '뱅상'(장-밥티스트 듀란트)은 '제레미'를 노골적으로 경계합니다. 마을 신부 '필리프'(자크 드블레)는 숲에서 버섯을 따며 '제레미' 주변을 맴돌고, 옛 친구 '왈테르'(다비드 아얄라)와의 관계도 어색하기만 하죠. 그러던 중 '제레미'와 '뱅상'의 갈등이 격화되고, 우발적 살인이 벌어집니다.
'제레미'는 현대 영화사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캐릭터 중 하나인데요. 30대 초반으로 보이지만 때로는 더 어리고 성숙해 보이기도 합니다. 성적 정체성은 유동적이고, 과거는 베일에 싸여 있으며, 미래에 대한 계획도 없죠. 심리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제레미'는 전형적인 혼돈형 애착 장애를 보이는데요. 친밀감을 갈망하면서도 그것을 파괴하는 모순적 행동, 관계 패턴의 일관성 부족, 안전 기지를 찾아 고향에 돌아왔지만 스스로 그 안전함을 위협하는 '뱅상'을 제거해 버리는 일이 그러했죠.
그는 자신이 원하는 '가족'을 폭력으로 재구성합니다. 더 섬뜩한 것은 그의 행동에 나름의 논리가 있다는 점인데요. 경계성 성격장애의 특징인 버림받음에 대한 공포, 정체성 혼란, 충동성이 모두 드러나지만, 한편으로는 나르시시즘적 조작술도 탁월하죠. 모든 사람의 욕망을 자신에게 향하게 만들고, 그것을 자신의 생존 도구로 활용합니다.
알랭 기로디 감독이 교묘하게 숨겨놓은 것은 오이디푸스 신화의 현대적 재해석인데요. '제레미'는 상징적 아버지인 '뱅상'을 살해하고, 어머니 '마르틴'을 차지하죠. 하지만 전통적 오이디푸스와 달리 진실이 밝혀진 후에도 파국이 아닌 기묘한 해피엔딩으로 이어집니다. 특히 '장 피에르'에 대한 '제레미'의 감정은 복잡한데요. '제레미'가 사진을 응시하는 장면에서 드러나듯, 그는 과거 동성애적 감정을 품었던 '진짜 아버지'를 그리워하죠. '뱅상'의 살해는 단순한 충동이 아니라 아버지 자리를 차지하려는 무의식적 욕구의 발현입니다.
'마르틴' 역시 흥미로운 캐릭터인데요. 진실을 외면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제레미'가 만든 새 질서를 수용하는 공모자가 된 것일까요? 마지막 장면에서 '제레미'를 침대로 받아들이는 행위는 모든 과거를 사후 승인하고, 그를 가족의 새 주인으로 인정하는 가부장제의 인장처럼 보입니다.
영화 제목 <미세리코르디아>는 라틴어로 '자비'를 뜻하는데요. 그런데 '제레미'와 신부 '필리프'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자비는 기묘하게 뒤틀려 있죠. 이들은 서로의 어둠을 공유하면서 기이한 공생관계를 형성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신부가 죄인을 용서하는 구조 같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죠. '제레미'는 자신의 성적 매력이라는 권력을 쥐고 있고, '필리프'는 종교적 권위에도 불구하고 욕망 앞에서 무력한 존재가 됩니다.
'제레미'의 경계성 성격장애와 '필리프'의 종교적 억압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데요. '제레미'는 버림받음에 대한 공포로 누군가의 절대적 보호가 필요하고, '필리프'는 평생 금욕으로 억눌러온 욕망의 배출구가 필요했죠. 둘 다 각자의 방식으로 사회적 경계선 밖에 서 있는 아웃사이더들입니다. '뱅상'의 시체를 함께 옮기는 장면에서 이들은 완전한 공범이 되죠. 이는 범죄 공모가 아니라, 일종의 '대안 가족' 형성 과정임을 기로디 감독은 암시합니다. 혈연도 제도도 아닌, 순전히 욕망과 필요로 결합한 관계의 새로운 모델이죠.
<미세리코르디아>는 범죄 스릴러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욕망과 도덕, 사랑과 소유, 용서와 공모에 관한 철학적 탐구인데요. 작품의 진정한 공포는 '제레미'의 살인이 아니라, 우리가 그에게 매혹된다는 사실입니다. 알랭 기로디 감독은 관객을 거울 앞에 세워놓고 묻죠. "당신도 충분히 절망적인 상황에서라면 이런 선택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 영화는 답을 주지 않고, 다만 질문만 남깁니다.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자신의 도덕적 경계가 생각보다 흔들리기 쉽다는 것을 깨닫죠. 바로 이것이 알랭 기로디가 의도한 "세상을 흔드는" 영화의 힘일 것입니다. '제레미'는 우리 안의 어둠을 비추는 거울이죠. 그리고 그 거울 속 모습이 생각보다 낯설지 않다는 것이, 정말로 무섭습니다. ★★★★
2025/07/18 CGV 용산아이파크몰
※ 영화 리뷰
- 제목 : <미세리코르디아> (Misericordia, 2024)
- 개봉일 : 2025. 07. 16.
- 제작국 :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 러닝타임 : 104분
- 장르 : 드라마
-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 감독 : 알랭 기로디
- 출연 : 펠릭스 키실, 카트린 프로, 자크 드볼레, 장-밥티스트 듀란트, 다비드 아얄라 등
- 화면비율 : 2.35: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