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세개반이상만 #53] <내 말 좀 들어줘>
'팬지'(마리안 장 밥티스트)는 매일 아침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깹니다. 햇빛이 들어오는 창문, 뒷마당에서 우는 비둘기 소리조차 '팬지'에게는 위협이죠. 런던 교외의 단독주택에서 배관공인 남편 '커틀리'(데이빗 웨버), 22세 아들 '모지스'(투웨인 바렛)와 함께 살고 있지만, '팬지'의 하루는 온통 분노로 가득합니다. 이미 완벽한 집을 더욱 완벽하게 청소하고, 가족들에게 쏟아내는 독설로 하루를 시작하죠.
'팬지'가 밖으로 나서면 상황은 더 악화됩니다. 가구점에서는 소파에 눕는 연인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마트에서는 느린 계산원 때문에 소란을 피우죠. 주차장에서는 자리를 노리는 운전자와 욕설을 주고받습니다. '팬지'에게는 모든 사람이 적이고, 모든 상황이 전쟁터인데요. "웃고 있는 자선단체 사람들, 정말 못 견디겠어. 아기 옷에 주머니는 왜 달린 거야? 아기가 주머니에 뭘 넣을 건데, 칼이라도?" 식탁에서 쏟아내는 '팬지'의 말들은 처음엔 웃음을 자아내지만, 점차 그 뒤에 숨겨진 절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팬지'의 유일한 안식처는 동생 '샨텔'(미셸 오스틴)인데요. 헤어 디자이너인 '샨텔'은 두 딸 '케일라'(애니 넬슨), '알리샤'(소피아 브라운)와 함께 웃음이 끊이지 않는 삶을 살고 있죠. 언니와는 정반대로 밝고 긍정적인 '샨텔'만이 '팬지'의 독설을 받아낼 수 있는데요. 어머니의 날을 맞아 5년 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무덤을 함께 방문하자는 '샨텔'의 제안에, '팬지'는 극도로 거부반응을 보입니다. 그리고 결국 억지로 끌려간 묘지에서,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상처들이 한꺼번에 폭발하죠.
'팬지'를 처음 만나는 순간, 관객은 본능적으로 도망치고 싶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97분이 지나고 나면, 관객은 이상하게도 '팬지'를 안아주고 싶어질 것입니다. 마이크 리 감독의 <내 말 좀 들어줘>는 바로 이런 마법을 부리죠. 세상에서 가장 만나기 싫은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이해하고 싶은 사람으로 바꿔버리는 마법 말입니다.
'팬지'의 분노에는 명확한 패턴이 있는데요. '팬지'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모든 것에 화를 내죠. 가구점에서 소파에 눕는 연인들, 마트에서 느린 계산원, 주차장에서 자리를 노리는 운전자. 모든 상황에서 '팬지'는 먼저 공격합니다. 상처받기 전에 상처를 주는 것이죠. 이는 깊은 두려움에서 비롯된 방어기제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을 해칠 것이라는 확신, 그래서 먼저 적대시해야 한다는 강박 말이죠.
두 자매의 집을 보면 그들의 내면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팬지'의 집은 화이트 톤의 무균 상태죠. 벽에는 아무것도 걸려있지 않고, 하얀 카펫 위에서는 반드시 실내화를 신어야 합니다. 뒷마당에는 꽃 대신 비둘기 방지 장치가 설치되어 있죠. '샨텔'의 아파트는 정반대인데요. 알록달록한 색감으로 가득하고, 베란다와 거실에는 식물들이 무성하며, 둥근 식탁은 가족 모두가 둘러앉을 수 있게 설계되었습니다.
마이크 리 감독은 "'팬지'의 집은 '팬지'의 편집증을, '샨텔'의 아파트는 색과 빛, 식물과 기쁨을 보여준다"라고 설명한 바 있는데요. 한 캐릭터의 성격을 시각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그의 연출 철학이죠. 하지만 여기서 핵심은 대비 자체가 아닌데요. '샨텔'이 '팬지'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이 핵심이죠. "이해는 못 해도 사랑해"라는 '샨텔'의 말은 이 영화의 심장박동과도 같습니다.
"왜 삶을 즐기지 못하냐"라는 '샨텔'의 절규에 '팬지'는 "모르겠다"라고 답하죠. 이는 영화에서 가장 정직한 순간입니다. '팬지'조차 자신이 왜 이렇게 살아가는지 모르죠. 분노와 절망이 일상이 된 지 너무 오래되어, 이제는 다른 삶을 상상할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마리안 장 밥티스트는 이 장면에서 전사가 전투에서 외치는 것 같은 절규를 들려주죠. 그 목소리에는 수십 년간 쌓인 분노와 그 분노에 지쳐버린 영혼의 피로가 함께 담겨있습니다.
마이크 리 감독은 81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인간에 대한 깊은 호기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팬지'를 그저 '문제적 인물'로 그리지 않는 대신 '팬지'의 분노 뒤에 숨겨진 상처와 두려움을 섬세하게 포착하죠. 감독은 "관객이 알아서 판단할 문제다. 핵심은 우리가 관객에게 무엇을 전달하는가다"라고 말했는데요.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판단이 아닌 이해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팬지'의 일면이 있고, '샨텔'의 일면도 있죠. 핵심은 서로의 어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분명 <내 말 좀 들어줘>는 쉬운 영화가 아닌데요. 하지만 그 어려움을 견뎌낸 사람에게는 깊은 위로를 줍니다. 마이크 리 감독과 마리안 장 밥티스트가 완성한 이 작품이 우리에게 전하는 것은 결국 이것이죠.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이야말로 가장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진실 말입니다. ★★★☆
2025/08/06 씨네큐브 광화문
※ 영화 리뷰
- 제목 : <내 말 좀 들어줘> (Hard Truths, 2024)
- 개봉일 : 2025. 08. 20.
- 제작국 : 영국
- 러닝타임 : 97분
- 장르 : 드라마
- 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마이크 리
- 출연 : 마리안 장 밥티스트, 미셸 오스틴, 데이빗 웨버, 투웨인 바렛, 애니 넬슨 등
- 화면비율 : 2.35: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