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군사 독재가 파괴한 가족의 일상

[별세개반이상만 #54] <아임 스틸 히어>

by 양미르 에디터

브라질의 군사 독재 시절, 한 가족의 상처는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말할까요? 월터 살레스 감독의 <아임 스틸 히어>는 올해 아카데미 국제영화상을 받은 작품답게 역사의 상처를 개인의 서사로 녹여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정치 드라마라는 장르적 틀을 벗어나, 한 여성의 조용하지만, 강인한 저항을 통해 독재가 어떻게 일상을 파괴하는지,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그 폐허에서 희망을 건져 올리는지를 보여주는 깊이 있는 작품이죠.

1971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관객은 행복했던 '파이바' 가족의 일상을 목격합니다. 아버지 '루벤스 파이바'(셀톤 멜로)는 전직 국회의원이자 토목기사로, 다섯 아이와 아내 '유니스'(페르난다 토레스)와 함께 해변가 집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죠. 영화 초반부는 의도적으로 목가적인데요. 아이들이 해변에서 뛰어놀고, 가족들이 긴 식탁에 둘러앉아 웃음소리를 터뜨리며, 트로피칼리아 음악이 집 안을 가득 채웁니다.

4598_4222_1631.jpg 사진 = 영화 '아임 스틸 히어' ⓒ (주)안다미로

하지만 군부 독재 정권의 그림자는 이미 그들 위에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해변을 가로지르는 군용 헬리콥터, 불시 검문, 뉴스에 등장하는 테러 소식들은 이 평화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암시하죠. 그리고 예고된 파멸이 찾아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군 기관원들에 의해 '루벤스'는 '신문 조사'를 위해 끌려가죠. 그 순간 영화의 색채는 햇살 가득한 노란색에서 음울한 회색조로 바뀝니다. 가족의 중심축이 사라지면서 이들의 삶은 완전히 달라지죠.


페르난다 토레스가 연기한 '유니스'의 모습은 압도적인데요.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을 받은 페르난다 토레스의 연기는 절제의 미학을 보여주죠. 페르난다 토레스는 울부짖거나 과장된 감정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대신 단단하게 세운 어깨와 묵직한 침묵으로 고통을 견뎌내죠. '유니스'의 눈빛 속에서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실감과 동시에 가족을 지켜내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는데요. 세상이 자신들을 어떻게 바라보든 상관없다는 듯, '유니스'는 가족사진을 찍을 때도 밝게 웃어달라고 아이들에게 부탁하죠. 슬픔을 강요하는 세상에 맞서는 '유니스'만의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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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것은 <아임 스틸 히어>가 정치적 구호나 이념적 메시지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는 점인데요. 대신 일상의 작은 디테일을 통해 독재가 어떻게 개인의 삶을 파괴하는지 보여주죠. 해변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이 어느 순간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러워지고, 집 안에서 나누던 자유로운 대화가 점점 줄어듭니다. 가족들이 모여 앉는 식탁의 분위기도 달라지죠. 빈 의자 하나가 만들어내는 침묵의 무게를 온 가족이 감당해야 합니다.

월터 살레스 감독이 어린 시절 '파이바' 가족과 친구였다는 사실이 영화 곳곳에서 느껴는데요. 그는 "음악과 사람과 의견이 오가는 생동감 넘쳤던 그곳에 경찰이 배치되고 모든 문이 닫힌 모습은 평생 잊지 못할 충격"이었다고 회상했습니다. 그 개인적 기억이 영화에 진정성을 부여하죠. 강제 실종이 한 생명을 앗아가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남겨진 이에게 끝나지 않는 심리적 고문을 가한다"라는 감독의 말처럼, 이 영화는 부재의 고통을 온몸으로 겪어내야 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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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스틸 히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설정은 페르난다 토레스와 페르난다 토레스의 실제 어머니인 페르난다 몬테네그로가 같은 역할을 나이대별로 연기한다는 점인데요. <중앙역>(1998년)으로 골든 글로브 후보에 올랐던 몬테네그로를 이어 딸 토레스가 이번에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을 받은 것 자체가 이미 세대 간 기억의 전승을 상징하죠. 토레스는 수상 소감에서 "이 상을 95세인 몬테네그로에게 바친다"라며, 예술이 힘든 시기에도 삶을 통해 지속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관객에게 깊은 여운을 남기죠. 이 장면에서 세 가지 층위의 의미가 겹칩니다. 첫째는 기억의 역설적 힘인데요. 개인적 기억은 병으로 사라져가지만 역사적 트라우마는 여전히 선명하죠. 둘째는 세대를 거친 전승의 의미입니다. 실제 모녀가 연기한 설정이 물리적으로 구현하는 기억의 대물림이죠. 셋째는 'I'm Still Here(아임 스틸 히어)'의 진정한 의미, 즉 모든 것을 잃어도 여전히 '여기 있다'는 존재 자체의 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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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관객들에게도 <아임 스틸 히어>는 남다른 의미로 다가오죠.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계엄령의 기억>이라는 제목으로 상영된 것처럼, 우리 역시 비슷한 역사를 경험했기 때문인데요. 권위주의 정권의 억압, 강제 실종, 진실 규명을 위한 투쟁, 이 모든 것들이 지구 반대편 브라질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기억과 겹치죠.

그렇게 <아임 스틸 히어>는 거대한 역사를 미소와 침묵으로 밀어낸 한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과거의 복원을 넘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진실'과 '존엄'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묻는 조용한 외침인데요. 직접 기억하는 이들은 사라지더라도, 그 기억은 유산이 되어 후대에 남겨져야 하죠.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서는 순간, 우리는 모두 그 기억의 증인이 됐습니다. ★★★★

관람일 : 2025/05/02 메가박스 전주객사
-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JIFF) 상영작

※ 영화 리뷰
- 제목 : <아임 스틸 히어> (I'm Still Here, 2024)
- 개봉일 : 2025. 08. 20.
- 제작국 : 브라질
- 러닝타임 : 138분
- 장르 : 드라마
-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월터 살레스
- 출연 : 페르난다 토레스, 셀튼 멜로, 페르난다 몬테네그로, 길헤르메 실베이라, 발렌티나 에르사지에 등
- 화면비율 : 1.85: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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