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세개반이상만 #55] <3학년 2학기>
'경인하이텍고등학교' 3학년 '창우'(유이하)에게는 자신감이 없습니다. 자격증도 내신도 부족하지만, 출석률만큼은 1등인 그가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길은 많지 않죠. 'M&H 엔지니어링'의 실습생이 된 후 취업에 성공한다면, 대학 진학과 병역특례까지 지원받을 수 있다는 담임교사의 조언에 따라, '창우'는 인천 남동공단의 낯선 공장으로 향합니다.
'창우'와 함께 같은 회사에 배치된 절친 '우재'(양지운)는 정반대의 성격이죠. 자신만만하고 자유분방한 '우재'는 상사에게 혼나도 크게 개의치 않으며, 화장실에 숨어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도 합니다. 취직이 어려우면 해병대에 입대하면 된다는 그의 태도는 '창우'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죠. 한편, 먼저 실습을 시작한 '성민'(김성국)은 '에이스'로 불리며 모든 이의 기대를 받고 있고, '다혜'(김소완)는 특유의 밝고 현실적인 성격으로 동료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습니다.
'창우'는 이 낯선 환경에서 용접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배우며 작은 성취감을 맛보는데요. 첫 월급으로 막냇동생이 원하던 브랜드 치킨을 사주고, 둘째에게는 무선 이어폰을 선물하죠. 하지만 일터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는데요. 멀지 않은 곳에서 발생한 사고 소식이 들려오자, '창우'와 친구들은 자신들이 딛고 선 땅의 불안함을 실감하게 됩니다.
<3학년 2학기>는 이란희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인데요. 감독이 영화를 구상하게 된 계기는 1990년대 극단 활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동료들과 함께 1988년 온도계 제조업체에서 수은중독으로 사망한 청소년 노동자 문송면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고자 했지만 무산된 것인데요. 세월이 흘러 첫 장편 <휴가>(2021년) 개봉 후 산재피해가족네트워크 '다시는' 관계자들과 만나던 중 감독은 현장실습 중 사망한 김동준 군의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감독은 "그 만남이 계기가 되어 두 번째 장편영화는 현장실습생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라고 밝혔죠.
하지만 <3학년 2학기>는 죽음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이 감독은 "죽음의 기록을 계속 들춰보면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지만, 죽은 이의 친구였을, 혹은 후배였을 청소년들의 삶을 그려보고 싶었다"라며, "여전히 살아남아서 일을 하는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를 보여주는 것이 어린 나이에 노동을 시작하는 청소년들을 더 잘 바라볼 수 있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라고 설명했죠.
영화 제작을 위해 감독은 2년여에 걸친 방대한 취재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직업계고 졸업생과 재학생, 교사, 특성화고노동조합 활동가, 교육청 관계자,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 청년 노동운동 활동가, 용접사 등을 두루 만나며 현실적인 디테일을 쌓아갔는데요.
이런 <3학년 2학기>의 가장 큰 특징은 명확한 악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실습생들을 다그치는 '송대리'(김아석)도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회사에 안전장비 구입을 요청하고, 느리고 산만하다고 평가하면서도 '창우'가 용접을 배우고 싶다는 의지를 보일 때는 이를 응원하죠. '창우'의 어머니 '현정'(강진아)도 남편이 없는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세 아들을 키우느라 바쁘지만, 아들들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습니다.
이란희 감독은 "여러 사람을 만나다 보니 이런 역할들을 어떤 하나의 그룹으로 적대자나 관문 수호자로 그룹화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각자 나름대로 애쓰며 살고 있는 인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라고 말했는데요. 실제 노동운동을 해온 활동가에게 "현장에서 신입들에게 소리를 지르느냐"라고 물었을 때, "위험해서 당연히 욕도 나오고 소리도 지르게 된다"라는 답변을 들었다며, 현실의 복잡함을 그대로 영화에 담으려 했다고 밝혔습니다.
<3학년 2학기>는 화려한 볼거리나 극적인 반전이 없는데요. 대신 '창우'가 아침마다 공장으로 출근하고, 점심시간에 동료들과 함께 밥을 먹고, 퇴근 후 집에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일상의 반복을 차분히 따라가죠. '창우'가 자신의 이름을 써넣는 장면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의미가 있는데요. 장례식장 부의 봉투에서부터 회사 출근부에 이르기까지, 그가 쓰는 이름은 점차 또박또박해지죠. 이는 한 사람의 성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창우'의 취미인 기타 연주도 그의 성장을 은유적으로 드러내는데요. 공장에서 다친 상처투성이 손으로도 포기하지 않고 연주하는 헨델의 '울게 하소서'는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자신만의 영역을 지켜나가려는 의지를 상징합니다. 거친 노동 현장과 대비되는 클래식 음악의 선율은 '창우' 내면의 섬세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가 여전히 꿈을 품고 있는 존재임을 암시하죠. 또한, '창우'가 지하철에서 승무원복을 입은 여고생들을 바라보는 장면에 대해서 감독은 "직업계고 여학생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담지 못했다는 아쉬움 때문에 넣은 장면"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3학년 2학기>가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하죠. "부모를 잘 만나지 못해도, 타고난 재능을 찾지 못해도, 꿈이 없어도, 성실하게 노동하며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누구나 인간으로서 평등한 권리를 인정받으며 살 수 있다면 좋겠다"라는 감독의 바람이 고스란히 담겨있는데요. 지독할 정도로 평범한 이야기이지만, 바로 그 평범함 때문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는 작품이 됐습니다. ★★★★
2025/09/03 메가박스 군자
※ 영화 리뷰
- 제목 : <3학년 2학기> (The Final Semester, 2025)
- 개봉일 : 2025. 09. 03.
- 제작국 : 한국
- 러닝타임 : 104분
- 장르 : 드라마
- 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이란희
- 출연 : 유이하, 김성국, 양지운, 김소완, 김아석 등
- 화면비율 : 2.35: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