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세개반이상만 #56] <3670>
함경북도 청진 출신인 '철준'(조유현)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탈북민 특별전형으로 대학 입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의 일상은 평범해 보이는데요. 탈북민 친구들과 교회에 나가 '새터민 청년 장학금'을 받기도 하고, 간증도 했으며, 형제 같은 동생들과 축구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내죠. 하지만 '철준'에게는 이들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으니, 바로 자신의 성 정체성입니다.
외로움을 견디던 '철준'은 용기를 내어 게이 커뮤니티 '술번개'에 참석하죠. 러브샷도 하고 탈북민임을 솔직히 밝히며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만, 결국 아무에게도 선택받지 못한 채 쓸쓸히 집으로 돌아옵니다. 만남 앱을 켜봐도 "탈북민 친구를 찾는다"라는 그의 소개글을 비아냥거리는 메시지들만 가득하죠. 그런 '철준'에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술번개'에서 만났던 '영준'(김현목)이 그가 일하는 편의점에 손님으로 나타난 것이죠.
'영준'은 '철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지며 각자의 성장배경과 현재 상황을 공유하죠. '영준'의 도움으로 '철준'은 '이 바닥'의 생리를 하나씩 배워가는데요. 옷차림, 스킨케어, 헤어스타일부터, 가라오케에서는 방청객처럼 앉아 있으면 안 되고, 노래도 불러야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다는 충고까지 말이죠.
모임에 완벽하게 적응한 '철준'은 사람들이 먼저 찾는 존재가 됩니다. 클럽에서 춤추고, 함께 밤을 보내며, 아침에 중국집 음식을 시켜 먹는 무리의 핵심 멤버로 자리잡죠. 그가 그토록 원했던 '중국집 음식을 함께 시켜 먹을 이쪽 친구들'이 드디어 생긴 것인데요. 하지만 영화는 예측할 수 있는 해피엔딩으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박준호 감독의 장편 데뷔작 <3670>은 제목부터 암호 같습니다. '종로3가, 6번 출구, 7시에 만나자'라는 뜻의 게이 커뮤니티 은어에서 따온 제목처럼, 영화는 특정 집단의 언어로 시작해 결국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보편의 언어로 귀결됩니다. 탈북자이면서 성소수자인 '철준'의 남한 적응기를 그린 <3670>은 자칫 센세이셔널할 수 있는 소재를 놀라울 만큼 차분한 시선으로 바라보죠.
"탈북자 교육 자원봉사 활동을 하며 얻은 경험이 작품의 원천이 됐다"라고 말한 박준호 감독은 "탈북자가 늘 과거의 서사로만 소비되는 것에 아쉬움이 있었다. 그들의 출신이나 과거가 아닌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는 존재로 그리고 싶었다"라고 설명했는데요.
더 주목할 만한 것은 그의 퀴어 영화에 대한 접근법이죠. "새로운 퀴어 영화를 만들고 싶었는데 탈북민과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유사성에 집중하게 됐다. 두 집단 모두 사회에서 자신을 위장할 수 있다는 유사성이 있다"라고 말한 박 감독은 "기존 퀴어 영화가 흔히 다뤄왔던 정체성 갈등이나 혐오 기반의 대립 대신, 이미 스스로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특히 그는 혐오 표현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보였는데요. "주로 퀴어 영화에서는 성소수자를 인정하지 않는 인물, 혐오를 주요 갈등 장치로 다룬다. 그러나 관객의 관점에서 이를 보고 싶지 않았고, 때로는 스크린에 담기는 혐오가 재생산될 위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라며,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면 관객들 역시 살아가는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3670>이 흥미로운 이유는 특수한 상황을 보편적 경험으로 번역해 낸 데 있죠. 실제로 영화를 보다 보면 탈북이나 퀴어라는 특정성을 넘어 누구나 경험하는 '처음'의 순간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새로운 학교, 새로운 직장, 새로운 동아리에서 느꼈던 그 어색함과 간절함, 소속되고 싶은 욕망과 배제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고스란히 전해지죠.
<3670>은 소수자 서사가 어떻게 보편적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인데요. 교회에서 간증하는 탈북 게이라는, 어떤 면에서는 도발적일 수 있는 설정을 이토록 자연스럽고 따뜻하게 풀어낸 박준호 감독의 연출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하죠. "우리 다 행복하려고 여기 온 거 아니겠니?" ★★★☆
2025/09/04 아트나인 이수
※ 영화 리뷰
- 제목 : <3670> (3670, 2025)
- 개봉일 : 2025. 09. 03.
- 제작국 : 한국
- 러닝타임 : 124분
- 장르 : 드라마, 멜로/로맨스
-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박준호
- 출연 : 조유현, 김현목, 조대희, 배한솔, 임지형 등
- 화면비율 : 2.35: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