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세개반이상만 #57] <어쩔수가없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는 웃음과 전율, 그리고 씁쓸한 현실 인식이 교묘하게 뒤섞인 블랙 코미디입니다. 25년간 제지회사에 몸담은 전문가 '만수'(이병헌)가 갑작스러운 해고 통보를 받으며 벌어지는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구직자의 극단적 생존기로 읽히죠. 하지만 그 속에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냉혹함과 중산층의 허상, 그리고 가부장제의 위기라는 묵직한 주제들이 층층이 쌓여있습니다.
영화는 완벽해 보이는 가정의 모습으로 시작하는데요. 정원에서 '만수'는 아내 '미리'(손예진), 두 자녀, 그리고 두 마리의 반려견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죠. "이제야 다 이룬 것 같다"라는 그의 독백은 곧 무너질 평화에 대한 전조가 됩니다. 회사의 미국인 신임 사주들이 보낸 값비싼 장어는 해고 통보의 전령이었고, '만수'의 삶은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죠.
13개월 후, 창고에서 박스를 나르며 면접을 전전하던 '만수'는 마침내 절벽 끝에 내몰립니다. 집은 압류 위기에 처했고, 아내는 치위생사로 일터에 나섰죠. 그가 간절히 원하는 자리에는 경쟁자들이 버티고 있는데요. 이때 '만수'에게 떠오른 아이디어는 소름 끼치도록 논리적입니다. '경쟁자들을 제거하면 자신이 유일한 후보가 되지 않겠는가?' "어쩔 수가 없다"라는 회사의 해고 사유가 이제는 자신의 살인 동기가 되죠.
박찬욱 감독이 20년간 품어온 이 프로젝트는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액스>를 원작으로 합니다. 박 감독은 "관객이 질문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라며, "현대 한국 중산층의 삶에서 최저선이 어디인지, 어느 정도 삶을 영위해야 인간다운 삶이라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었다고 밝혔는데요. 이러한 의도는 가부장적인 '만수'의 캐릭터 구성에서 드러나죠. 그는 악인이 아니라 시스템의 희생자이자 동시에 그 시스템을 내재화한 인물입니다.
이병헌은 이런 복합적 캐릭터를 탁월하게 소화해 내죠. 그의 연기는 절박함과 코믹함, 선량함과 광기를 절묘하게 오가는데요. 특히 살인 계획을 세우면서도 어딘가 서툰 아마추어적 면모를 보이는 장면들은 웃음과 동시에 섬뜩함을 자아내죠. 손예진이 연기한 '미리' 역시 주목할 만합니다. 위기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현실 감각과 가족을 지키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미리'는 '만수'의 극단적 선택과 대비되는 이성적 대응을 보여주죠.
영화의 시각적 완성도 역시 탁월한데요. 김우형 촬영감독과의 협업으로 탄생한 영상미는 '만수'의 시점을 중심으로 하다가도 때로는 중립적 관찰자의 위치에서 상황을 바라보게 만들죠. 류성희 미술감독이 설계한 '만수'의 집은 '불란서 주택' 양식과 브루탈리즘을 결합해 캐릭터의 다층적 내면을 공간으로 형상화했는데요. 특히 분재 온실과 정원은 분재 및 조경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디테일한 미장센을 완성했죠.
한편, 박찬욱 감독의 연출력은 여전히 빛을 발합니다. 박 감독은 "전작의 유머가 은근했다면, <어쩔수가없다>에서는 좀 더 노골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는데, 실제로 이 영화의 유머는 더 직접적이면서도 날카롭죠. '만수'가 화분으로 경쟁자를 제거하려다가 실패하는 장면이나,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 벌어지는 난투극은 웃음과 긴장감을 동시에 선사합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성취한 것은 오락성과 사회적 메시지의 절묘한 균형인데요. '만수'의 극단적 선택을 통해 현대 자본주의의 모순을 드러내면서도, 그것을 무거운 사회 고발이 아닌 블랙 코미디로 포장해 내죠. 관객은 웃으면서도 불편함을 느끼고, 그 불편함 속에서 우리 사회의 민낯을 마주하게 됩니다. 특히 결말부의 AI 관련 장면들은 미래에 대한 경고이기도 한데요. 기술 발전으로 인한 일자리 감소는 '만수' 같은 인물들을 더 많이 양산할 것이고, 그들의 절망은 더욱 극단적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를 담고 있죠.
그렇게 <어쩔수가없다>는 박찬욱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헤어질 결심>(2022년)의 세련된 미학이나, <올드보이>(2003년)의 강렬한 임팩트와는 다른 결의 작품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독의 역량이 퇴보했다는 뜻은 아닌데요. 오히려 현실적 소재를 다루면서도 자신만의 색깔을 잃지 않는 노련함을 보여줍니다. 웃음 뒤에 숨겨진 날카로운 통찰, 그리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연출력이야말로 진정한 거장의 면모라 할 수 있겠죠. ★★★★
2025/09/17 영화의전당 중극장
-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상영작
※ 영화 리뷰
- 제목 : <어쩔수가없다> (No Other Choice, 2025)
- 개봉일 : 2025. 09. 24.
- 제작국 : 한국
- 러닝타임 : 139분
- 장르 : 스릴러, 코미디
-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박찬욱
- 출연 : 이병헌, 손예진, 박희순, 이성민, 염혜란 등
- 화면비율 : 2.35: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