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SIWFF에서 만난 귀한 영화들

[양미르의 영화영수증 #84] 27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감상 영화 ①

by 양미르 에디터
4614_4272_5922.jpg 사진 = 봉태규 배우(왼쪽), 변영주 감독(오른쪽)이 27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사회를 맡았다. ⓒ SIWFF

27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집행위원장 황혜림, 이하 SIWFF)가 8월 21일 메가박스 신촌에서 개막식을 진행하고 27일까지 총 7일간의 여성영화 축제를 시작했다. 총 38개국 138편의 여성영화와 함께 다양한 콘셉트로 구성된 토크 프로그램과 현장 이벤트를 만날 수 있는 이번 영화제는 'F를 상상하다'라는 슬로건으로 진행된다. 개막식의 사회를 맡은 배우 봉태규는 "슬로건처럼 'F'로 시작하는 단어 'FUNNY', 'FANTASTIC'하게 영화제를 즐기시면 좋겠다"라고 언급했다. 몇몇 작품을 감상한 에디터의 짤막한 후기들을 모았다.


4614_4273_00.png 사진 = 영화 '바람이 불어오는 곳' ⓒ SIWFF

1. <바람이 불어오는 곳>

- 섹션 : 새로운 물결
- 감독 : 애멜 게랠티
- 출연 : 에야 벨라가, 슬림 바카르, 손도스 벨하센 등
- 등급 : 15세 관람가 / 상영시간 : 99분


'알리사'(에야 벨라가)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우울증에 빠진 어머니와 어린 여동생을 돌봐야 하는 현실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다. '알리사'에게는 절친 '메흐디'(슬림 바카르)가 있다.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취미로 그림을 그리며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는 감수성 풍부한 예술가다. 두 사람 모두 현재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구체적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전환점은 '알리사'가 제르바에서 열리는 작가 공모전 포스터를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우승자에게는 독일에서 6개월간 머물 기회가 주어진다. '알리사'는 이것이 그들이 튀니지를 떠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확신하며 '메흐디'를 설득한다. "독일은 파란 눈에 금발머리, 그리고 빨간 여권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한 곳"이라고 말하는 '알리사'의 표현에서 우리는 '알리사'가 얼마나 간절히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다. 결국 두 사람은 돈도 없고 차도 없는 상황에서, '알리사'가 한 남자의 차를 '빌려오는' 무모한 방법으로 튀니지를 가로지르는 여행을 시작한다.

4614_4274_021.jpg

튀니지 출신의 애멜 게랠티 감독이 이 영화에서 가장 공들인 부분은 현실과 상상이 자연스럽게 교차하는 연출이다. '메흐디'는 고된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친구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떠올리며 초현실적인 그림을 그린다. '알리사'는 그런 이야기와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만의 현실을 재구성한다. 편집이나 색 보정 없이도 '알리사'의 상상은 곧 내러티브 안에서 현실처럼 펼쳐진다. 교실에서 선생님이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하거나, 자기 팔에서 식물이 자라나는 장면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환상적 요소들은 시각적 유희를 위한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억압적인 현실 속에서도 상상력을 잃지 않으려는 젊은이들의 의지를 상징한다. 감독은 "꿈조차 꿀 수 없다면, 우리에겐 뭐가 남는 걸까?"라는 '알리사'의 질문을 통해 이 영화의 핵심 메시지를 전달한다. 사회적 배경이나 교육 수준과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현실을 견뎌낼 수 있게 해주는 비상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4614_4275_036.png

작품에서 흥미로운 것은 '알리사'와 '메흐디'의 관계 설정이다. 일반적인 로드무비에서 기대할 수 있는 로맨스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용감하고 적극적인 여성 캐릭터와 섬세하고 내성적인 남성 캐릭터의 조합을 만난다. 게랠티 감독은 의도적으로 전통적인 성역할을 뒤바꿨다고 밝혔다. "전 세계적으로, 아랍 세계에서는 남녀를 구분한다. 하지만 나는 역할을 섞는 데 중점을 두었다"라는 감독의 말처럼, 이러한 설정은 보편적인 인간관계의 가능성을 탐구했다.

4614_4276_047.png 사진 = 영화 '꽃풀소' ⓒ SIWFF

2. <꽃풀소>

- 섹션 : 특별상영
- 감독 : 임중완
- 출연 : 이지연, 한승희, 장희지 등
- 등급 : 전체 관람가 / 상영시간 : 80분


다큐멘터리라는 장르가 갖는 가장 큰 무기는 '진짜'라는 것이다. 아무리 정교하게 짜인 각본도, 아무리 뛰어난 연기도 현실이 만들어내는 우연성과 필연성의 교차점을 따라갈 수는 없다. 임중완 감독의 <꽃풀소>는 바로 그런 지점에서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불법 개 농장 옆에서 발견된 15마리(영화에서는 '목숨 명'을 사용한다)의 소. 이들을 구조하려던 '동물해방물결' 활동가들이 강원도 인제군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마을을 살릴 계획을 세우진 않았다. 그저 소들이 평생을 안전하게 보낼 수 있는 공간을 찾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인구 100명도 채 되지 않는 인제군의 신월리. 젊은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고, 학교는 문을 닫았다. 전형적인 소멸위험지역의 모습이다. 그런 곳에 청년 활동가들이 나타나 소를 돌보겠다고 한다. 처음엔 의아해하던 마을 어르신들이 점차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은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부분이다. "처음엔 소들이 다 똑같아 보였다. 그런데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건 만남이었다"라는 영화 속 한 활동가의 말은 인상적이다.

4614_4277_118.png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존재를 인정하는 일이고, 관계의 시작이다. 고깃덩어리로만 여겨지던 소 한 마리 한 마리에게 이름이 생기면서, 그들은 개별적인 존재가 된다. 각자의 성격과 취향, 아픈 곳까지 세심하게 관찰받는 대상이 된다. 흥미로운 건 이런 변화가 소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을 어르신들 역시 이 젊은 활동가들을 처음엔 '도시에서 온 이상한 사람들' 정도로 여겼을 터.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 각각을 알아가게 된다. 누가 더 성실하고, 누가 더 말이 많고, 누가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는지. 그렇게 서로를 알아가면서 관계가 쌓인다.

여기서 감독의 시선이 날카롭게 빛난다. 동물권 운동가와 축산업자 사이의 긴장감을 예상했겠지만, 현실에서는 오히려 소통의 가능성이 열린다. 소를 기르며 살아온 사람들이기에 오히려 소의 습성을 더 잘 아는 것이다. 적대관계로 여겨졌던 두 집단이 '소를 잘 돌보자'라는 공통의 목표 아래에서 협력하게 되는 모습은 예상치 못한 반전이다.

4614_4278_128.png

<꽃풀소>는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물권 문제와 지역소멸 문제는 언뜻 별개의 이슈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 생명에 대한 존중, 공동체에 대한 관심, 지속 가능한 삶에 대한 고민. 이 모든 것들이 '생추어리' 만들기라는 하나의 프로젝트 안에서 만났다.

4614_4279_138.jpg 사진 = 영화 '사미아' ⓒ SIWFF

3. <사미아>

- 섹션 : 새로운 물결
- 감독 : 야세민 삼데렐리
- 출연 : 일함 모하메드 오스만, 파티아 모하메드 압시에, 파타 게디 등
- 등급 : 15세 관람가 / 상영시간 : 102분


영화는 2011년 리비아 사막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사미아'(일함 모하메드 오스만)의 모습으로 문을 연다. 무장괴한들에게 쫓기며 사막을 가로지르는 '사미아'의 발걸음은 절망적이면서도 어딘가 익숙하다. 곧이어 화면은 과거로 되돌아가 어린 '사미아'가 동네 아이들과 경주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아버지 '유수프'(파타 게디)의 격려 속에서 자란 '사미아'에게 달리기는 자유 그 자체였다. 여성의 스포츠 활동을 금지하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위협이 날로 거세지는 상황에서도, '사미아'는 새벽마다 몰래 집을 빠져나와 훈련을 계속했다.

'사미아'의 성장 과정은 소말리아라는 국가의 비극적 현실과 맞물려 있다. 1991년 독재정권 붕괴 이후 계속된 내전은 일상을 파괴했고, '알샤바브'를 비롯한 무장 단체들은 시민들의 삶을 옥죄었다. 학교에서는 코란 암송만이 허용되었고, 여성들은 히잡 착용을 강요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반바지를 입고 뛰는 '사미아'의 모습은 그 자체로 저항이었다. 17세가 된 '사미아'는 마침내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출전이라는 꿈을 이룬다.

4614_4280_23.jpg

하지만 히잡 없이 경기에 임하는 '사미아'의 모습이 고국에 방송되면서 새로운 위기가 찾아온다. 종교적 보수세력의 위협이 거세지자, 사미아는 2012년 런던 올림픽을 목표로 소말리아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유럽으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험난했다. 인신매매 업자들의 손에 넘어간 '사미아'는 리비아 사막과 지중해에서 죽음의 위기에 처한다.

비극적인 실화를 보유한 <사미아>가 가진 가치는 분명하다. 이 영화는 우리가 쉽게 간과하기 쉬운 난민들의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며, 꿈을 향한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숭고한지를 일깨운다. '사미아'에게 달리기는 경쟁이나 명예가 아닌 생존의 수단이었고, 자유를 향한 갈망의 표현이었다. '사미아'의 발걸음 하나하나에는 억압받는 모든 여성의 염원이 담겨 있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만성피로 아저씨의 휴가 대작전, 팝콘 영화로는 만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