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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WFF에서 만난 다채로운 여성 영화들

[양미르의 영화영수증 #85] 27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감상 영화 ②

by 양미르 에디터
4616_4286_3622.jpg 사진 = 개막작 '선샤인'을 연출한 앙투아네트 하다오네 감독 ⓒ SIWFF

27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집행위원장 황혜림, 이하 SIWFF)가 8월 21일 메가박스 신촌에서 개막식을 진행하고 27일까지 총 7일간의 여성영화 축제를 시작했다. 총 38개국 138편의 여성영화와 함께 다양한 콘셉트로 구성된 토크 프로그램과 현장 이벤트를 만날 수 있는 이번 영화제는 'F를 상상하다'라는 슬로건으로 진행된다. 개막식의 사회를 맡은 배우 봉태규는 "슬로건처럼 'F'로 시작하는 단어 'FUNNY', 'FANTASTIC'하게 영화제를 즐기시면 좋겠다"라고 언급했다. 몇몇 작품을 감상한 에디터의 짤막한 후기들을 모았다.


4616_4287_3750.jpg 사진 = 영화 '선샤인' ⓒ SIWFF

1. <선샤인>
- 섹션 : 개막작
- 감독 : 앙투아네트 하다오네
- 출연 : 마리스 라칼, 아니카 코, 제니카 가르시아 등
- 등급 : 15세 관람가 / 상영시간 : 92분

'선샤인'(마리스 라칼)은 국가대표 선발전을 앞둔 리듬체조 선수다. 평생을 바쳐온 체조에서 '선샤인'은 완벽한 균형감각을 자랑하지만, 인생에서는 그렇지 않다. 선발전 직전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선샤인' 앞에는 두 개의 길이 놓인다. 꿈을 포기하고 어머니가 되거나, 불법 낙태를 감행하고 올림픽을 향해 나아가거나. 영화는 '선샤인'이 '키아포 교회' 주변의 좁은 골목길을 헤매는 장면으로 '선샤인'의 혼란을 시각화한다.

검은 나사렛 예수상이 모셔진 성스러운 공간 바로 옆에서 낙태약이 팔리는 아이러니한 풍경은 필리핀 사회의 위선을 고발한다. 종교적 금기와 현실적 필요 사이에서 여성들이 얼마나 위험한 선택을 강요당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공간이다. 앙투아네트 하다오네 감독은 이 모순된 풍경을 통해 가톨릭 국가에서 여성이 마주하는 딜레마를 날카롭게 포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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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선샤인'의 여정을 따라가며 등장하는 신비로운 소녀는 '선샤인'의 내면을 외재화한 장치로 기능한다. 때로는 양심의 소리로, 때로는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거울로 작용하는 이 캐릭터는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의 <조조 래빗>(2019년)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감독이 밝힌 바 있다. 하지만 하다오네 감독은 와이티티의 판타지적 접근과 달리, 이 상상의 친구를 통해 '선샤인'의 심리적 압박감과 죄책감을 구체화한다.

<선샤인>이 진정한 힘을 발휘하는 순간은 '선샤인'이 주변 어른들로부터 받는 반응을 다룰 때다. 산부인과 의사는 예수의 선함을 설교하고, 남자친구의 아버지인 목사는 아이의 교육비를 지원하겠다고 나선다. 하지만 정작 '선샤인' 본인의 의지는 누구도 묻지 않는다. 모두가 '선샤인'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선샤인'의 목소리를 지워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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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선샤인'이 가장 자유로운 모습을 보이는 곳은 체조장이다. 리본을 휘두르며 공중에서 몸을 날리는 '선샤인'의 모습은 사회적 억압에서 벗어난 순수한 자아를 상징한다. 감독은 체조 동작을 통해 '선샤인'의 내면 상태를 시각적으로 구현했다. 완벽한 연기를 펼칠 때의 '선샤인'은 누구의 시선도, 판단도 의식하지 않는다.

마리스 라칼의 연기는 작품의 큰 자산이다. 체조선수로서의 신체적 완성도부터 감정적 취약성까지, 마리스 라칼은 '선샤인'이라는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촉망받는 체조선수에서 절망에 빠진 소녀까지, 극과 극을 오가는 감정 변화를 자연스럽게 소화해 냈다.


4616_4290_3949.jpg 사진 = 영화 '술타나의 꿈' ⓒ SIWFF

2. <술타나의 꿈>
- 섹션 : 확장된 시선: 인도의 재구성
- 감독 : 이사벨 에르구에라
- 목소리 출연 : 미렌 아리에타, 데자니 무케르지, 미렌 가빌론도 등
- 등급 : 12세 관람가 / 상영시간 : 87분

이사벨 에르구에라의 장편 데뷔작 <술타나의 꿈>을 보고 난 후 머릿속에 남은 건 화려한 애니메이션 기법도, 페미니즘 담론도 아닌 하나의 씁쓸한 깨달음이었다. 1905년과 2023년, 두 시공간을 오가며 펼쳐지는 이 작품은 여성들이 꿈꾸는 세상과 실제로 살아가는 현실 사이의 간극을 잔혹할 만큼 선명하게 드러낸다. 스페인 예술가 '이네스'(미렌 아리에타 목소리)는 관계 정리를 위해 인도로 떠났다가 우연히 베검 로케야 사카와트 호사인이 1905년에 쓴 '술타나의 꿈'과 마주한다.

남성들이 집 안에 격리되고 여성들이 평화롭게 나라를 다스리는 유토피아 '레이디랜드'를 그린 이 소설에 매료된 '이네스'는 작가와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로 엮어내기로 결심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감독이 선택한 서사 구조다. 이사벨 에르구에라 감독은 원작을 그대로 각색하는 대신, 현대의 한 여성이 과거의 텍스트를 발견하고 해석하는 과정 자체를 영화의 중심에 놓았다. 이는 단순한 적응이 아니라 텍스트와의 만남, 그리고 그 만남이 개인에게 미치는 파급력에 대한 탐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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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스'의 여정은 물리적으로는 스페인과 인도, 이탈리아를 가로지르지만, 정신적으로는 과거와 현재, 꿈과 현실을 넘나든다. 호사인 작가의 원작 속 '레이디랜드'는 완벽한 유토피아다. 하루 두 시간만 일하고, 전쟁을 즉시 끝낼 수 있는 기계가 있으며, 폭력적인 남성들은 안전하게 격리되어 있다. 반면 '이네스'가 마주하는 현실은 여전히 남성의 시선에 움츠러들고, 안전한 공간을 찾아 헤매는 여성들의 세계다. 영화는 이 두 세계를 번갈아 보여주며 관객에게 묻는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정말 무엇이 바뀌었는가?

감독은 이야기의 층위만큼이나 복합적인 애니메이션 기법을 구사한다. '이네스'의 현실적 여정은 수채화 배경 위의 디지털 애니메이션으로, 호사인의 전기적 부분은 그림자 인형극을 연상시키는 컷아웃 기법으로, '레이디랜드'의 환상적 세계는 헤나 타투의 정교한 패턴을 활용한 기법으로 각각 표현된다. 이는 10년 이상에 걸친 제작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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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게라 감독은 2005년부터 인도와 중국, 독일 등지에서 애니메이션을 가르치며 쌓은 경험을 이 작품에 고스란히 녹여냈다. 감독은 서구적 관점으로 동양의 이야기를 재단하지 않기 위해 각 문화권의 고유한 시각적 언어를 찾아 적용했다고. <술타나의 꿈>은 완벽한 작품은 아니다. 구성이 산만하고, 메시지 전달이 직접적이며, 일부 캐릭터들은 존재 이유가 모호하다. 그러나 이런 불완전함조차 작품의 주제와 맞닿아 있다. 여성들의 꿈과 현실이 완전히 일치할 수 없듯, 그 꿈을 담은 영화 또한 완벽할 수 없다.

에르게라 감독이 만든 것은 결국 '아름다운 미완성'이다. 호사인의 유토피아적 상상력과 현대 여성의 현실적 고민이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간극, 그 사이의 긴장감이 이 영화의 진짜 힘이다. 꿈과 현실이 연결되어 있지만 결코 일치하지 않는 세상에서, 여성들은 여전히 자신만의 공간을 찾아 헤맨다. 마지막에 이르러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혁명의 완성이 아니라 혁명의 가능성이다. 1905년 호사인이 글로 그려낸 '레이디랜드'가 2023년 '이네스'의 영상으로 재탄생하는 순간, 꿈은 또 다른 꿈을 낳는다.


4616_4293_4315.png 사진 = 영화 '레이니 블루' ⓒ SIWFF

3. <레이니 블루>
- 섹션 : 발견
- 감독 : 야나기 아스나
- 출연 : 야나기 아스나, 겐조 류, 코라 켄고 등
- 등급 : 전체 관람가 / 상영시간 : 108분

고등학교 3학년 '아오이'(야나기 아스나)는 미래에 대한 확신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아오이'에게 유일한 자부심이라면 전설적인 배우 류 치슈가 100년 전 같은 학교를 졸업한 선배라는 사실뿐이다. 학교 옥상에서 벌인 폭죽 사고로 처벌을 받게 된 '아오이'는 마지못해 지역 영화관에서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1953년)를 관람하게 된다. 극장 안 관객들이 모두 "늙었다"라며 비웃던 '아오이'는 어느덧 스크린에 펼쳐진 오즈 야스지로의 세계에 완전히 매료되고 만다.

야나기 아스나 감독이 <레이니 블루>에 담아낸 것은 영화에 대한 사랑 고백이자 문화적 유산에 대한 책임감이다. 감독 자신이 류 치슈와 맺고 있는 신비로운 인연(같은 학교 출신, 생가 근처 거주, 출생 연도와 입학 연도가 정확히 100년 차이 난다는 것)은 우연을 넘어선 운명적 연결고리로 느껴진다. 하지만 동급생 중 누구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현실은 문화적 기억의 단절에 대한 위기감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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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아오이'가 부실에서 발견하는 오래된 대본은 바로 이런 문화적 연속성의 상징이다. 감독은 실제로 고등학교 연극부 부실에서 수십 년 된 선배들의 각본과 도구들을 발견했을 때의 감동을 영화에 고스란히 옮겨놓았다. 처음에는 "전부 버려버리자"라고 생각했던 3평 남짓한 더러운 부실이 결국 감독에게 가장 소중한 공간이 된 것처럼, '아오이'에게도 그 낡은 대본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한다.

<레이니 블루>에서 눈에 띄는 것은 영리한 메타적 장치들이다. '아오이'의 친구 '우사미'를 40대 감독, 와타나베 히로부미가 연기한다는 설정은 기이하면서도 매력적이다. 애니메이션을 좋아하지만, 왕따가 두려워 숨기는 캐릭터를 중년 남성이 교복을 입고 연기하는 장면들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흐린다. 더 나아가 와타나베 감독은 극 중 '영화감독'으로도 등장해 "영화가 길을 잃은 이들에게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비춰준다"라고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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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레이니 블루>는 영화의 힘에 대한 믿음을 담은 작품이다. 영화는 수동적 관람의 대상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우리 삶에 개입하는 존재다. 야나기 감독이 "영화나 연극 등의 문화예술은 만난 사람의 마음을 바꿀 정도로 큰 힘이 있다"라고 믿는 것처럼, '아오이'에게 영화는 혼란스러운 현실을 헤쳐나갈 나침반이 된다. 영화를 통해 길을 찾은 '아오이'처럼, 이 작품 역시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문을 두드리는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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