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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난 보석 같은 영화들 ①

[양미르의 영화영수증 #93] 30회 부산국제영화제 감상 영화 ①

by 양미르 에디터


4682_4526_3146.jpg 사진 =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어쩔수가없다'의 박찬욱 감독과 배우들이 개막식에 참석했다. ⓒ 부산국제영화제

30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지난 9월 17일 개막해 오는 9월 26일까지 영화의 전당 일대에서 펼쳐지고 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가 개막작으로 상영된 가운데, 올해 영화제는 64개국 328편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으며, 총 7개 극장, 31개 스크린으로 상영관을 확대해 관객들의 편의성을 높였다. 올해 영화제는 새롭게 신설된 경쟁 부문에서 아시아 작품 14편을 대상으로 다섯 개 부문에서 ‘부산 어워드’ 시상을 진행해 의미를 더하기도 했다. 몇몇 작품을 감상한 에디터의 짤막한 후기들을 모았다.


4682_4527_3354.jpg 사진 = 영화 '여름의 랑데뷰' ⓒ 부산국제영화제

1. <여름의 랑데뷰>

- 섹션 : 월드 시네마
- 감독 : 발렌틴 카디크
- 출연 : 블랑딘 마덱, 인디아 헤어, 아카디 라데프 등
- 등급 : 15세 관람가 / 상영시간 : 78분

노르망디에서 올라온 '블랑딘'(블랑딘 마덱)은 수영 경기 관람이라는 명확한 목적을 갖고 파리에 도착한다. 하지만 '블랑딘'의 여행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큰 배낭 때문에 올림픽 경기장 출입이 거부되고, 10년 만에 만나기로 한 이복자매 '줄리'(인디아 헤어)와의 만남마저 어색하기만 하다. 호스텔의 2층 침대에서 밤마다 들려오는 낯선 이들의 속삭임과 웃음소리 사이에서, '블랑딘'은 혼자라는 사실을 더욱 선명하게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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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블랑딘'은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블랑딘'은 배낭을 메고 개선문에서 노트르담까지, 관광 명소에서 낙서투성이 골목길까지 파리를 가로지른다. 거대한 야외 스크린에서는 레옹 마르샹의 수영 경기가 중계되고 거리는 축제 분위기로 들끓지만, '블랑딘'의 눈에는 다른 풍경들이 포착된다. 올림픽을 위해 거리에서 쫓겨나는 노숙자들, 행사 비용에 항의하는 시위대, 그리고 그 모든 소란 속에서도 각자의 일상을 이어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 말이다.

거대한 스포츠 이벤트가 한 도시를 뒤덮을 때, 우리가 놓치는 것들이 있다. 2024년 파리 올림픽이라는 화려한 무대 뒤편에서, 한 여성이 걸어간 길을 따라가다 보면 중계 카메라가 포착하지 못한 진짜 파리를 마주할 수 있다. 발렌틴 카디크 감독의 장편 데뷔작 <여름의 랑데뷰>는 바로 그 '화면 밖' 이야기를 섬세하게 직조해 낸 작품이다. 카메라는 화려한 스펙터클보다는 틈새의 인간적 순간들에 더 오래 머물렀다.

4682_4529_3552.jpg 사진 = 영화 '아일랜드' ⓒ 부산국제영화제

2. <아일랜드>

- 섹션 : 월드 시네마
- 감독 : 쟌 올 거스터
- 출연 : 샘 라일리, 스테이시 마틴, 잭 파딩 등
- 등급 : 15세 관람가 / 상영시간 : 121분

'톰'(샘 라일리)은 카나리아 제도의 고급 리조트에서 테니스 코치로 일한다. 한때 라파엘 나달과 경기를 펼쳤다는 전설적인 일화로 관광객들 사이에서 '에이스'라 불리지만, 그것도 오랜 이야기다. 지금의 '톰'은 낮에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테니스를 가르치고, 밤에는 나이트클럽에서 술과 마약에 취해 아무나와 잠자리를 갖는 일상을 반복한다. 그런 '톰'의 일상에 변화가 찾아온 것은 영국인 부부 '앤'(스테이시 마틴)과 '데이브'(잭 파딩), 그리고 그들의 아들 '안톤'(딜런 토렐)이 리조트에 투숙하면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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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은 아들에게 테니스 레슨을 받게 하고 싶어 하지만, '톰'은 이미 스케줄이 꽉 차 있다며 거절한다. 하지만 앞선 테니스 실력을 보인 '안톤'과 묘하게 익숙한 느낌을 주는 '앤'에게 이끌려, '톰'은 결국 개인 레슨을 받아들인다. 더 나아가 그들 가족을 위해 더 좋은 객실로 옮겨주고, 섬 곳곳을 안내해 주며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함께 보낸 저녁 식사 후 나이트클럽에서 술을 마시던 '데이브'가 갑작스럽게 사라진다. 다음 날 아침, 평소와 다름없이 숙취에 시달리며 깨어난 '톰'은 앤으로부터 '데이브'가 밤새 돌아오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는다.

<아일랜드>는 표면적으로는 실종 사건을 다룬 미스터리지만, 본질적으로는 한 남자의 정신적 각성에 관한 이야기다. '톰'에게 '앤'과 '안톤'의 등장은 문자 그대로 '균열'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단단히 쌓아 올린 무책임과 회피의 벽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틈새로 스며든 것은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가능성, 사랑할 수 있었던 기회, 성장할 수 있었던 순간들이었다.

4682_4531_3637.jpg 사진 = 영화 '사랑이 지나간 자리' ⓒ 부산국제영화제

3. <사랑이 지나간 자리>

- 섹션 : 아이콘
- 감독 : 흘리뉘르 팔메이슨
- 출연 : 스베리르 구드나손, 사가 가르사르도티르, 이다 메킨 흘린스도티르 등
- 등급 : 15세 관람가 / 상영시간 : 109분

어부 '매그너스'(스베리르 구드나손)와 시각예술가 '안나'(사가 가르다르스도티르)는 세 자녀와 함께 작은 마을에 살고 있다. 정확히는 '살고 있었다'가 맞다. 영화가 시작될 때 이미 두 사람은 별거 중이지만, '매그너스'는 여전히 가족의 집을 드나들며 아이들과 농구하고 '안나'와 저녁을 함께한다. 이별의 구체적 이유는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는다. 다만 '매그너스'가 몇 주씩 바다에 나가 있는 동안 안나가 홀로 육아를 담당해 왔다는 사실, 그리고 '안나'가 더 이상 그런 관계를 원하지 않는다는 현실만이 서서히 드러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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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리뉘르 팔마손 감독은 현실적 일상과 초현실적 환상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시각화한다. '매그너스'가 '안나'의 불평으로 인해 공격적인 수탉을 죽인 후, 그의 꿈속에는 거대해진 수탉이 나타나 복수를 꿈꾼다. '안나'가 거만한 스웨덴 갤러리스트와의 실망스러운 만남 후, '안나'가 비행기 추락을 상상하는 장면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환상 시퀀스들은 등장인물들이 표면적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감정의 깊은 층위를 탐구한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매그너스'가 바다에 홀로 떠 있는 모습이다. 석양이 지는 먼 지평선을 바라보며 파도에 몸을 맡긴 채 구조를 기다리는 이 장면은 그의 심리적 고립감을 완벽하게 은유한다. 실제 상황인지 상상인지 모호하게 처리된 이 시퀀스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로 사용되어 깊은 여운을 남긴다. 그렇게 <사랑이 지나간 자리>는 기존의 이혼 드라마가 가진 클리셰들을 의도적으로 피한 작품이 됐다.

4682_4533_3731.jpg 사진 = 영화 '러블리 데이' ⓒ 부산국제영화제

4. <러블리 데이>

- 섹션 : 월드 시네마
- 감독 : 필리프 팔라도
- 출연 : 닐 엘리아스. 하산 마흐부바, 로즈-마리 페로 등
- 등급 : 15세 관람가 / 상영시간 : 119분

<러블리 데이>는 '알랭'(닐 일라이어스)이라는 신랑의 시선으로 결혼 당일 24시간을 그려낸다. 그런데 이 영화가 흥미로운 지점은 전통적인 웨딩 코미디의 공식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여기엔 해피엔딩을 위한 코믹한 사건·사고들이 아니라, 한 개인의 깊숙한 내면 풍경이 펼쳐진다. '알랭'은 결혼을 30분 앞두고, 사촌이자 들러리인 '에두아르'(하산 마부바)와 함께 교통체증에 갇혀 있다. 렌터카 대신 견인차를 타고 가야 하는 상황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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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진짜 문제는 차 안에서 시작된다. '알랭'의 만성적인 복통이 도져오고, 불안이 엄습한다. 그의 머릿속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기억들이 파편처럼 흩어져 있다. 부모의 이혼, 아버지의 폭언, 크론병으로 인한 고통,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까지. 성당에 도착한 후에도 '알랭'의 혼란은 계속된다. 신부 '버지니'(로즈마리 페로)는 '알랭'을 이해하려 하지만 점점 지쳐간다. 이혼한 부모인 '엘리아스'(조르주 카바즈)와 '욜란드'(히암 아부 셰디드)는 하루 휴전을 선언했지만 언제 폭발할지 모를 시한폭탄 같다.

팔라도 감독이 작품에서 선택한 시각 언어는 독특하다. 현재의 장면들은 4:3 비율의 답답한 프레임 안에 갇혀 있다. 마치 '알랭'의 내적 상태를 반영하듯 화면 자체가 숨 막힌다. 반면 과거의 기억들은 와이드스크린으로 펼쳐진다. 이런 화면비의 대조는 '알랭'이 현재에 얼마나 갇혀 있는지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불안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과거와 현재를 뒤섞고, 관객 역시 그의 혼란스러운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게 된다.

4682_4535_3918.jpg 사진 = 영화 '공화국의 독수리' ⓒ 부산국제영화제

5. <공화국의 독수리>

- 섹션 : 아이콘
- 감독 : 타릭 살레
- 출연 : 페레스 파레스, 리나 쿠드리, 지네브 트리키 등
- 등급 : 15세 관람가 / 상영시간 : 129분

'조지 파미'(파레스 파레스)는 '스크린의 파라오'로 불리며 이집트 영화계를 호령하는 최고 스타다. 화려한 펜트하우스에서 자신보다 훨씬 어린 연인 '도냐'(리나 쿠드리)와 생활하며, 아들뻘 되는 여자친구의 나이 차이도 개의치 않는 자유분방한 삶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일상은 생각보다 초라하다. 아내와는 별거 중이고, 대학생인 아들과의 관계도 어색하기만 하다. 야심 찬 연인은 자신을 이용해 성공하려 들고, 나이든 스타는 몰래 비아그라를 사러 다니는 처지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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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에게 정부 관계자들이 접근해 온다. 현 대통령의 전기영화에서 대통령 역을 맡아달라는 제안이었다. 처음에는 "대머리에 뚱뚱한 대통령을 내가 어떻게 연기하느냐"라며 거부했지만, 아들에 대한 협박이 시작되자 상황은 달라진다. 촬영장에서 만난 정부 감시자 '만수르' 박사(아므르 와케드)는 "대통령과 닮게 연기할 필요 없다"라며 '조지'의 모습으로 대통령을 연기하라고 지시한다. 이는 '조지'의 스타 이미지와 대통령의 권위를 결합하려는 치밀한 계산이었다.

이 영화가 한국 관객들에게 기시감을 주는 이유는 명확하다. 우리 역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달라지는 문화예술계의 풍경을 목격해 왔기 때문이다. 국정농단 사태 당시 드러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문제, 정치적 성향에 따라 좌우되는 영화진흥위원회의 정책 변화, 그리고 특정한 '국가관'을 요구받는 상황들은 '조지 파미'가 처한 딜레마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예술적 자유와 경제적 생존, 그리고 정치적 안전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하는 창작자들의 고민은 전 세계를 막론하고 보편적인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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