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미르의 영화영수증 #94] 30회 부산국제영화제 감상 영화 ②
30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지난 9월 17일 개막해 오는 9월 26일까지 영화의 전당 일대에서 펼쳐지고 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가 개막작으로 상영된 가운데, 올해 영화제는 64개국 328편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으며, 총 7개 극장, 31개 스크린으로 상영관을 확대해 관객들의 편의성을 높였다. 올해 영화제는 새롭게 신설된 경쟁 부문에서 아시아 작품 14편을 대상으로 다섯 개 부문에서 ‘부산 어워드’ 시상을 진행해 의미를 더하기도 했다. 몇몇 작품을 감상한 에디터의 짤막한 후기들을 모았다.
1. <센티멘탈 밸류>
- 섹션 : 아이콘
- 감독 : 요아킴 트리에
- 출연 : 레나테 레인스베, 스텔란 스카스가드, 잉가 입스도테르 릴레오스 등
- 등급 : 12세 관람가 / 상영시간 : 133분
<센티멘탈 밸류>는 어머니의 장례식으로 본격적인 사건이 시작되는 작품이다. 오슬로의 붉은 지붕과 장식적 처마를 가진 거대한 가족 주택에서 열린 추도식에 예상치 못한 인물이 나타난다. 바로 15년간 영화를 만들지 않았던 전설적 감독 '구스타프'(스텔란 스카스가드). 그는 전처와 이혼한 후 딸들과 거의 연락을 끊고 살아왔지만, 아내의 죽음을 계기로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려 한다.
'구스타프'의 두 딸은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다. 큰딸 '노라'(레나테 레인스베)는 국립극장에서 활동하는 연극배우다. 하지만 무대 공포증에 시달리며, 첫 장면에서는 코르셋을 입은 채 무대 뒤에서 극심한 공황 발작을 일으킨다. '노라'는 기혼 동료 배우와 불안정한 관계를 유지하며, 감정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다. 반면 둘째 딸 '아그네스'(잉가 입스도테르 릴레오스)는 학술 연구자로 일하면서 남편과 아들과 함께 평온한 가정생활을 꾸리고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영화에 출연한 경험이 있지만, 연기 대신 안정적인 삶을 선택했다.
'구스타프'는 '노라'에게 자신의 신작 영화 주연을 제안한다. 이 작품은 나치 점령기 오슬로에서 반나치 활동으로 수용소에 끌려갔던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자전적 영화다. 하지만 '노라'는 대본조차 읽어보려 하지 않고 냉정하게 거절한다. 아버지에 대한 불신과 원망이 뿌리 깊기 때문이었다. <센티멘탈 밸류>는 가족 드라마의 전형적인 틀 안에서도 새로운 깊이를 발견하게 만드는 작품으로, 예술이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결국 치유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조용히 전한다.
2. <부고니아>
- 섹션 : 아이콘
- 감독 : 요르고스 란티모스
- 출연 : 엠마 스톤, 제시 플레먼스, 에이든 델비스 등
- 등급 : 15세 관람가 / 상영시간 : 120분
'테디'(제시 플레먼스)는 양봉업자이자 자칭 진실 추적자다. 그는 사촌 동생 '돈'(에이든 델비스)과 함께 허름한 농가에서 살며, 세상의 모든 음모를 꿰뚫어보는 자신만이 지구를 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의 타깃은 제약회사 CEO '미셸 풀러'(엠마 스톤)다. '테디'는 '미셸'이 외계인이며, 지구상의 벌들을 몰살시켜 인류를 멸망시키려 한다고 확신한다. 이들의 계획은 치밀하다 못해 광기에 가깝다. '테디'와 '돈'은 양봉복을 입고 '미셸'의 집 앞에서 기다렸다가 '미셸'을 납치한다.
'미셸'은 현대 기업 문화의 완벽한 화신이다. '미셸'은 직원들에게 "5시 30분에 퇴근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물론 일이 끝났을 때만"이라는 단서를 붙인다. 다양성 교육 비디오를 촬영하면서는 "다양성"이라는 단어가 너무 많이 반복된다며 짜증을 낸다. 엠마 스톤은 이런 위선적 캐릭터를 차갑고도 매력적으로 연기한다. 특히 머리를 밀고 지하실에 감금당한 후에도 협상가로서의 본능을 잃지 않는 모습은 압권이다.
<부고니아>가 완벽한 영화냐고 묻는다면 거짓일 것이다. 일부 장면에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특유의 냉소주의가 과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포착한 시대정신은 무시할 수 없다. 음모론과 기업 권력, 정보 과잉과 진실 부재라는 우리 시대의 핵심 모순들이 모두 담겨 있다. 현대인들이 겪는 이데올로기적 혼란은 2003년 장준환 감독 원작, <지구를 지켜라!> 때보다 더 깊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부고니아>의 존재 이유는 충분하다.
3. <가는 길에 딱 한 잔 더>
- 섹션 : 플래시 포워드
- 감독 : 프란체스코 소사이
- 출연 : 필리포 스코티, 세르지오 로마노, 피에르파올로 카포빌라 등
- 등급 : 15세 관람가 / 상영시간 : 100분
'마지막 한 잔'이라는 자기기만에 빠진 두 중년 남성의 이야기다. 하지만 이들의 한심한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베네토 지역의 황금빛 들판과 석양에 물든 풍경에 넋을 잃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프란체스코 소사이 감독의 교묘한 전략이 드러난다. '카를로비안키'(세르지오 로마노)와 '도리아노'(피에르파올로 카포빌라)는 전형적인 '루저' 캐릭터다. 50대가 넘은 이들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경제적으로 몰락했지만, 여전히 과거의 영광을 붙잡고 산다.
두 사람의 목적지는 아르헨티나에서 돌아오는 옛 친구 '제니오'(안드레아 페나키)를 공항에서 맞이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길은 험난하다. 매번 '진짜 마지막'이라고 다짐하면서도 다시 술잔을 기울이고, 무알코올 맥주를 마시고도 태연하게 취한 척하는 이들의 모습은 코믹하면서도 처연하다. 그러던 중 건축학과 학생 '줄리오'(필리포 스코티)와 우연히 마주치면서 이들의 예측할 수 없는 로드트립이 본격화한다.
<가는 길에 딱 한 잔 더>는 '한심한 아재들'의 이야기지만, 그 한심함이 곧 인간다움이라는 걸 보여준다. 베네토 지역의 아름다운 풍경은 이들의 초라한 현실과 대조되면서, 묘한 위안을 준다. 마치 인생이 아무리 엉망이어도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다고 속삭이는 것 같다. '마지막 한 잔'이라는 핑계로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는 이들처럼, 완벽하지 않아도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다는 걸 증명한다. 한편, '브리온 묘지'(드니 빌뇌브 감독의 <듄: 파트 2>(2024년)에도 등장한 바로 그 장소)가 나오는 시퀀스는 압도적이다.
4. <시라트>
- 섹션 : 아이콘
- 감독 : 올리버 라세
- 출연 : 세르지 로페즈, 브루노 누녜스, 스테파니아 가다 등
- 등급 : 15세 관람가 / 상영시간 : 115분
'루이스'(세르지 로페즈)와 그의 어린 아들 '에스테반'(브루노 누녜스)은 실종된 딸을 찾기 위해 모로코 사막을 헤맨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거대한 스피커들이 고대 문명의 건축물처럼 쌓아 올려진 사막 한가운데의 레이브 파티 현장. 귀를 찢을 듯한 전자음악 속에서 몸을 맡긴 채 춤추는 수백 명의 사람들 사이로, 실종된 딸의 사진을 들고 다니는 절망적인 아버지의 모습은 처음부터 이질적이다. 딸의 행방을 찾지 못한 '루이스'는 '레이버'들로부터 남쪽 모리타니아에서 열릴 다른 파티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나타난 군 차량들이 "국가 비상사태" 선언과 함께 파티를 해산시키고, 라디오에서는 제3차 세계 대전 발발 소식이 들려온다. 호위를 받으며 돌아가던 중, 레이버들의 트럭이 군대 호송대에서 이탈해 사막 깊숙이 사라진다. 딸을 찾을 마지막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루이스'는 충동적으로 그들을 뒤따른다. 사막을 가로지르는 여정 초반, 영화는 예상치 못한 따뜻함을 보여준다. 거친 외모와 달리 레이버들은 놀랍도록 친절하고 배려심 깊다.
영화의 3분의 2 지점부터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는다. "헉" 하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고, 거기서부터 <시라트>는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된다. 영화 제목 '시라트'는 이슬람 종말론에서 천국과 지옥을 잇는 다리를 의미한다. 영화 시작 부분에 나오는 설명처럼 이 다리는 "머리카락만큼 가늘고 칼날만큼 날카로워" 한 걸음만 잘못 디뎌도 지옥으로 떨어진다. 이 은유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며, "극한 상황에서 인간은 어떤 존재가 되는가"를 묻는다.
5. <프랑켄슈타인>
- 섹션 : 갈라 프레젠테이션
- 감독 : 기예르모 델 토로
- 출연 : 오스카 아이삭, 제이콥 엘로디, 미아 고스 등
-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 상영시간 : 144분
영화는 메리 셸리의 원작 구조를 충실히 따른다. 1857년 북극의 얼어붙은 바다에서 조난당한 탐험대가 상처투성이의 '빅터 프랑켄슈타인'(오스카 아이작)을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를 쫓아온 것은 그가 창조한 거대한 '피조물'(제이콥 엘로디)이다. 선원들과의 격투 끝에 잠시 물러난 크리처를 뒤로 하고, '빅터'는 선장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는 두 개의 장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빅터'의 관점에서 그려지는 창조의 과정이다. 어린 시절 냉혹한 아버지 '레오폴드'(찰스 댄스) 밑에서 자란 '빅터'는 사랑하는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죽음을 정복하겠다는 광적인 집념을 품게 된다. 에든버러 의과대학에서 시체를 되살리려는 실험으로 퇴학당한 후, 무기 상인 '하를란더'(크리스토프 발츠)의 후원으로 비밀 실험실을 차린다. 전쟁터에서 수집한 시체 부위들을 조합해 거대한 인조인간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특유의 시각적 탐미주의가 절정에 달하는 순간들이다.
두 번째 장은 크리처의 시점으로 전환된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창조주에게 버림받은 피조물은 세상을 떠돌며 인간성을 학습한다. 그를 받아들여 주는 것은 앞이 보이지 않는 노인뿐이었다. <프랑켄슈타인>은 기술적 완성도, 배우들의 헌신적인 연기, 그리고 무엇보다 원작에 대한 진정성 있는 애정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진정한 덕후가 넷플릭스의 자본과 최고의 스태프를 만났을 때 어떤 기적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