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미르의 영화영수증 #95] <결혼 피로연>
이안 감독의 1993년작 <결혼 피로연>을 32년 만에 되살린 앤드류 안 감독의 동명 신작은 시대적 필요성과 안전한 선택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한다. 결과적으로는 따뜻하고 매력적이지만, 예측할 수 있는 서사 구조의 한계 안에 머무르고 말았다. 영화는 시애틀의 한 집에서 함께 살아가는 두 동성 커플의 이야기다. 본채에는 레즈비언 커플 '안젤라'(켈리 마리 트란)와 '리'(릴리 글래드스톤)가, 별채에는 게이 커플 '크리스'(보웬 양)와 '민'(한기찬)이 거주한다.
이들은 혈연을 넘어선 '선택된 가족'의 형태로 서로의 삶을 지탱해 주고 있다. 그러나 각자의 현실적 문제들이 이들의 관계를 시험대에 올린다. '안젤라'와 '리'는 두 번째 시험관 시술 실패 후 경제적, 심리적으로 막다른 길에 서 있다. 한편, 한국의 재벌가 손자인 '민'은 학생 비자 만료를 앞두고 있다. 보수적인 할머니 '자영'(윤여정)은 그를 한국으로 불러들여 가업을 잇게 하려 하지만, '민'은 '크리스'와 미국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민'이 '크리스'에게 청혼하지만 거절당하자,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묘책이 등장한다. '민'과 '안젤라'가 위장 결혼을 하면 '민'은 영주권을 얻고, 그 대가로 '안젤라'와 '리'의 시험관 시술비를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가 나타난다. 손자의 결혼 소식을 듣고 '자영'이 갑작스레 시애틀로 날아온 것이다. 앤드류 안 감독과 원작 공동 각본가 제임스 샤머스는 영리하게도 1993년과 2025년 사이의 시대적 간극을 활용한다.
미국에서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지 10년이 지난 현재, 퀴어 커뮤니티가 직면한 문제들은 과거와 다른 양상을 띤다. 더 이상 커밍아웃 자체가 중심 갈등이 아니다. 대신 안정된 관계 속에서도 여전히 존재하는 불안감, 가족과의 관계에서 오는 압박, 경제적 현실 등이 새로운 장애물로 등장한 것. 앤드류 안 감독은 인터뷰에서 "관객들이 마음을 열고 영화를 보며 자신을 둘러싼 관계를 성찰하고, 캐릭터들이 서로에게 보여주는 관대함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라고 밝혔다.
실제로 영화는 이러한 의도를 충실히 구현한다. 특히 할머니 '자영'이 손자의 성정체성을 간파하면서도 그를 감싸 안는 모습은 세대를 초월한 사랑과 이해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순간이다. <미나리>(2020년)의 '순자'에 이어 윤여정이 창조한 '자영'은 또 하나의 기억에 남을 캐릭터다. 겉으로는 전형적인 보수적 할머니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누구보다 예리한 통찰력을 가진 인물이다.
윤여정은 작품에 대해 "지금이 우리가 세상에 '당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라고 전해야 할 순간인 것 같다"라고 언급했다. '자영'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그는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가치관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진정한 가족애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특히 '민'과의 대화 장면에서 "누가 뭐래도 넌 내 손자야"라는 대사는 앤드류 안 감독과 함께 만들어낸 것으로 알려져, 배우와 감독의 협업이 만들어낸 진정성 있는 순간이다.
조안 첸이 연기한 '안젤라'의 어머니 '메이' 역시 주목할 만한 캐릭터다. 'PFLAG'(피플래그-부모, 가족, 친구들의 레즈비언과 게이 지지 단체) 활동으로 퀴어 엘라이 상까지 받은 '메이'는 딸의 '남자와의 결혼' 소식에 "내 딸이 남자와 결혼한다고?"라며 경악하기도 한다.
이런 <결혼 피로연>의 가장 큰 약점은 지나치게 안전한 서사 선택에 있다. 두 커플이 각각 갈등을 겪고 헤어졌다가 결국 화해하는 과정은 로맨틱 코미디의 교과서적 공식을 그대로 따른다. '민'이 '크리스'가 자신과의 미래를 보지 못한다고 오해하며 떠나는 것, '리'가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안젤라'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것 등 이 모든 갈등의 전개와 해결이 예상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특히 중반 이후 드라마틱한 전환점들이 지나치게 순탄하게 해결되는 모습은 아쉽다. 할머니가 진실을 알아차리고도 손자를 받아들이는 과정, 각 커플의 화해 장면들이 감정적 충격 없이 매끄럽게 진행된다. 감독이 추구한 '부드럽고 따뜻한' 톤이 오히려 극적 긴장감을 약화시킨 면이 있다. 시대가 변했다고 해서 모든 갈등이 쉽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닌데, 영화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세계관을 제시한다. 그럼에도 <결혼 피로연>은 따뜻한 메시지와 뛰어난 배우들 덕분에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으로 남게 됐다. ★★★
2025/09/23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 영화 리뷰
- 제목 : <결혼 피로연> (The Wedding Banquet, 2025)
- 개봉일 : 2025. 09. 24.
- 제작국 : 미국
- 러닝타임 : 103분
- 장르 : 코미디, 멜로/로맨스
-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앤드류 안
- 출연 : 윤여정, 한기찬, 보웬 양, 릴리 글래드스톤, 켈리 마리 트란 등
- 화면비율 : 1.66: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