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은 실패하지 않는다, 다음 세대가 이어받을 뿐

[별세개반이상만 #59]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by 양미르 에디터

영화는 무장 조직 '프렌치 75'의 미국-멕시코 국경 이민자 수용소 습격으로 시작합니다. 이들은 이민자들을 감옥에서 탈출시키고, 낙태 금지법을 지지하는 의원실에 폭탄을 설치하며, 은행을 털어 자금을 마련하죠. "혁명 만세"를 외치며 질주하는 이들의 중심엔 '퍼피디아'(테야나 테일러)와 '밥'(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이 있는데요. 사랑과 혁명이 하나였던 시절, 두 사람 사이엔 딸 '윌라'(체이스 인피니티)가 태어납니다.

그러나 '록조' 대령(숀 펜)이 이끄는 정부군의 대대적 진압 작전으로 '프렌치 75'는 와해되고, '퍼피디아'는 사라지죠. 16년 후, '밥'은 술과 마약에 찌든 채 딸과 함께 숨어 지내는데요. 그가 입은 건 언제나 같은 체크무늬 가운이고, 머리는 덥수룩하며, TV 화면에선 질로 폰테코르보 감독의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 <알제리 전투>(1966년)가 흘러나옵니다. 과거의 영광을 되새기며 현재를 버티는 패잔병의 초상이죠.

4720_4681_5140.jpg 사진 =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그런 그에게 '록조'가 다시 나타납니다. 백인 우월주의 비밀 결사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 가입을 앞두고 '인종적 순수성'을 입증해야 하는 '록조'는 16년 전 '퍼피디아'와의 관계에서 태어난 윌라를 '제거'하려 하죠. 이제 고등학생이 된 '윌라'는 납치되고, '밥'은 옛 동료들을 찾아 나섭니다. 문제는 혁명 조직의 비밀 암호마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뇌가 망가졌다는 것이죠.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토머스 핀천의 1990년 소설 <바인랜드>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원작의 1960-80년대 배경을 현재로 옮겨왔습니다. 영화 속 미국은 특정 연도가 명시되지 않지만, '마일러 담요'로 덮인 이민자 수용소와 '깨어있음'을 둘러싼 세대 간 논쟁은 분명 현재를 가리키죠. 그리고 이 시대적 배경이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 동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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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더슨 감독은 "평범한 관객으로서 내가 보고 싶은 것은 감정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밝혔는데요. 그래서 그는 거대한 정치적 메시지를 가족 드라마 안에 녹여냈죠. 세상의 흐름을 따라잡기 불가능한 시대에서, 변하지 않는 요소들인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신념을 지키려는 의지,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열망에 집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의 진짜 승부수는 '윌라'라는 캐릭터였죠. '윌라'는 아버지 '밥'처럼 숨어 사는 삶을 거부합니다. 어머니 '퍼피디아'처럼 맹목적으로 싸우지도 않는데요. 가라테 사범 '세르지오'(베니시오 델 토로)에게서 배운 무술과 부모 세대가 겪은 실패를 보며 체득한 지혜로 자신만의 방식을 찾죠. '윌라'를 맡은 체이스 인피니티는 그 세대의 순수함과 부모와 세상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인함과 힘을 지니고, 영화에서 거쳐야 하는 놀라운 변화를 체화해 연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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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숀 펜의 '록조'는 다가오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유력 남우조연상 수상 후보로 거론되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죠. 겉으로는 인종 정화를 외치면서도 흑인 여성 '퍼피디아'에게 성적 집착을 보이는 이중성, 권력 앞에선 비굴하지만, 약자 앞에선 잔인한 속물성을 완벽히 구현했습니다. 숀 펜은 끔찍한 짓을 서슴지 않는 악역을 연기했지만, 동시에 인간미와 불안, 고독을 함께 담아냈는데, 이 '인간미'가 오히려 캐릭터를 더 섬뜩하게 만들죠.

그렇게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올해 가장 흥미로운 역설을 보여줍니다. 폭력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하고, 절망적이면서도 희망적이며, 미국에 관한 영화이면서도 전 세계 관객에게 말을 걸죠. 제목이 말하듯, 싸움은 끝나지 않습니다. 한 번의 전투 후 또 다른 전투가 기다리죠. '밥'이 '윌라'에게, '윌라'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달할 불씨. 그 불씨가 꺼지지 않는 한, 혁명은 실패한 게 아닙니다. 잠시 쉬어가는 것뿐이죠. ★★★★★

2025/09/25 CGV 용산아이파크몰 IMAX


※ 영화 리뷰
- 제목 :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One Battle After Another, 2025)
- 개봉일 : 2025. 10. 01.
- 제작국 : 미국
- 러닝타임 : 162분
- 장르 : 범죄, 액션
-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폴 토마스 앤더슨
- 출연 :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숀 펜, 베니시오 델 토로, 레지나 홀, 테야나 테일러 등
- 화면비율 : 1.85:1/1.43:1(IMAX)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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