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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에 톡, 립스틱 품고 다니기

한때 나의 도피처는 립스틱이었다


회사 다녀올게, 하고 두툼한 패딩을 꺼냈다. 주머니에 손을 톡 넣으니 뭔가 잡힌다. 슥 꺼내보니 립스틱. 이거는 무슨 컬러더라 뒤집어서 컬러 번호를 보고,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거울을 보며 입술을 칠해본다. 하얗게 생기 없어 보이던 얼굴이 환해진다.


한때 립스틱 수집이 취미였다. 입술은 하난데, 립스틱은 작은 플라스틱 수납케이스를 꽉 채우고도 두 통. 그중에는 같은 컬러만 사모으기도 했고, 오스트리아에 없는 컬러라며 유럽(어쩔 땐 미국 영국까지!) 사이트를 뒤져 배송받기도 하고, 이번의 한정판 리미티드 에디션이라며 여러 개 쟁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돈 벌어 립스틱에 탕진했던..! 지네는 발이 여러 개라 신발이라도 여러 켤레 질러도 핑곗거리가 있는데, 입술은 하난데 립스틱은 여러 개.(약간의 오버를 더해서 수백 개!)


마음이 한참 헛헛할 때가 있었다. 화장이고 뭐고 1도 생각 않고 살다가, 슬쩍 “메이크업”에 눈을 떴다. 그 시기에 마음이 너무나도 허전했고 그래서 지갑에 작은 여유가 생기면, 할인하던 화장품 가게를 들러 여러 컬러를 손등에 발라댔다. 포인트가 쌓여 할인쿠폰이 도착하면 또 집에 오는 길에 화장품 샵을 들렀다. 화장은 하지 않더라도 입술은 색이 있어야 “너 어디 아파?”소리를 듣지 않는 편이라, 그리고 빨갛고 채도가 짙은 컬러가 어울리는 편이라, 하늘 아래 같은 컬러는 없다며 그 핑계로 온갖 립스틱을 사다 모았다. 그래도 헛헛함은 결국 채워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다행이랄까… 사다 모으던 립스틱들이 약간은 관심사가 사그라들었다. 간혹 눈길이 가긴 하지만, 선뜻 지갑을 열진 않고 있다… 아직까지는!

그렇다고 이제 헛헛함이 가셨냐,,, 잠깐, 애정으로 채워진 헛헛함은 다시금 스멀스멀 올라오는 중이다. 그렇다고 지갑을 톡 열게 하진 않는 걸 보니 그때만큼의 헛헛함은 아니어서, 다행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다가 가라앉는다.


그래서, 옷장 안 외투와 패딩 속에는 언제 어떤 옷을 입어도 입술에 슥 바를 수 있게, 립스틱 하나쯤은 꼭 주머니에 있다. 입술 발라야지 하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아무것도 없다면? 앗, 오늘 입술 발라야 하는데!라고 핑계를 대며 지갑을 열러 갈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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