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여행의 패러다임을 바꿀 때가 왔다..
도쿄, 오사카, 교토, 고베, 나라, 다카마쓰, 나오시마, 후쿠오카, 나가사키, 사가, 아소, 유후인, 벳푸, 시모노세키, 모지코, 쓰시마, 시마바라, 미야자키, 가고시마, 이브스키.. 1992년부터 지금까지 일본의 20여 개 (소)도시들을 여행했다. 길게는 7일권 JR패스 기차여행, 짧게는 하루 여행으로 서울, 제주보다 더 저렴한 항공 혹은 선박으로 다녀올 때도 많았다.
후쿠오카는 다섯 번, 유후인은 네 번, 오사카와 교토는 세 번씩 다녀왔는데 같은 도시를 여러 번 간 이유는 함께 간 메이트들이 다 달랐기 때문이다.
나의 일본 여행 메이트들은 다양했다. 중학교 친구, 고등학교 친구, 두 아이들, 남편, 친정 엄마와 언니들, 시어머니와 시누이 그리고 동서까지..
나는 왜 한 번도 혼자 여행을 하지 않았던 걸까.
눈 맞추고 웃을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 여행이 특별한 순간으로 완성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특별한 순간들을 내 공간에 기록하는 것을 즐겼다. 내가 워낙 싱겁고 웃기를 좋아해 거의 우스개 에피소드들이지만 내 삶의 반딧불 같은 순간들의 기록이라 허세나 치장 없이 써왔다.
오늘 내 마음이 변했다.
나도 혼자 여행을 해봐야겠다.
<오늘 하루 나 혼자 일본 여행>을 주문할 때 솔직히 그렇게 큰 기대는 없었다.
내게 일본 여행 이야기는 그리 특별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부산의 지역적 특성상 일본은 마음만 먹으면 제주도보다 더 만만하게 다녀올 수 있는 초근접 해외이다. 대마도와 부산의 직선거리는 고작 49.5km이니 말이다. 대마도와 시모노세키, 후쿠오카 근교 등은 나 역시 당일 여행, 무박여행, 1박 여행 같은 짧은 일정으로 나만의 주제 또는 미션을 정해 여행을 해왔기에 솔직히 제목이 주는 호기심은 별로 크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어 보기로 한 이유는 무엇보다 출판사에 대한 믿음에 있었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출판사들과 1인 독립출판사 등에서 출간하는 셀 수 없이 많은 책들 중 전혀 모르는 신예 작가의 책을 선뜻 구입하기란 쉽지 않다.
매혹적인 제목의 책이라 샀는데 몇 장 읽어 보기도 전에 실망했던 책이 어디 한 두 권이던가.
수많은 실패의 경험 후 우연히 "좋은 책"을 만났을 때의 반가움이란.
그 후로 나는 책을 고를 때 출판사를 꽤 비중 있게 생각한다. 내가 신뢰하는 출판사의 철학은 나를 대신해 작가의 철학과 통찰이 있는 명료한 주제의 글을 찾아내 책을 만들 것이다. (철학이 있는 출판사라면 말이다)
이번에도 출판사를, 그 철학을 먼저 믿어 보기로 했다.
프롤로그를 보면 책 한 권이 얼핏 보인다.
프롤로그에서 보이는 작가의 하루 여행의 목적이 마음에 든다.
여행의 순수성 말이다. 낯선 세상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만나는 나의 참모습 찾기..
여행은 낯선 환경에 나를 밀어 넣고 내가 이전에 만나지 못했던, 나도 몰랐던 '나'와 만나는 경험 아니던가. 낯선 문화와 공간을 고생스럽게 즐기고 느끼는 시간은 결국 나조차 몰랐던 새로운 나를 여행하는 것과도 같다. 때론 나의 용감함에 놀라고 나의 무모함에 놀라기도 하고, 나의 사교적인 면에 놀라며 나의 뻔뻔함에 경악할 때도 있으니 말이다.
작가는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을 기혼의 삼십 대 직장인인 듯하다.
딸, 아내, 며느리, 박 대리(혹은 박 과장) 등 많은 관계와 호칭 속에서 상처를 받으며 하루하루 지치고 소진되어 결국 소멸해버릴 것 같은.. 끓다 끓다 없어지는 냄비의 뜨거운 물 같은 시절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 삼십 대도 그랬다.
다시 창창했던 삼십대로 돌아가겠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언제나 결단코 네버!라고 말할 만큼 그 시절의 치열함을 고스란히 기억한다.
든든한 울타리였던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두 아이를 낳아 기르고, 직장을 다니며, 주말엔 쉬지도 못 하고 매주 시댁에 가서 전신마비로 누워계신 시아버지를 힘겹게 보살피시는 시어머니를 도와드려야 했던.. 나의 삼십 대 그 10년 동안 나는 인생의 가장 거칠고 높은 파도 위에 있었다.
그때 이 책을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도망이든 균열이든, 숨통을 트이게 하는 일탈을 할 수 있었을까..
그때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제발 그러라고 말해주고 싶다.
"넌 많이 아플 거야. 네 마음에 쌓인 것들이 독이 되어 머지않아 네 몸을 힘들게 할 거거든. 하루라도 균열을 내어 자유로웠던 널 잠시나마 되찾는 시간을 가지렴.
제발 안 힘든 척하지 말고.."
이 책을 통해 내 삼십 대와 마주하니 뜬금없이 서럽다..
작가는 일상에 흠집 나지 않을 작은 균열을 내어 잠시 도망가듯 혼자 여행을 시작하여 스스로 숨통을 틔운다. 제세 심박동기 처치를 셀프로 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참으로 영민하다.
그리하여 사회생활에 있어 본인이 간과했던 진리를 발견한다. 바로 사회생활에서 만나는 그 누구와도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진리를 나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자신을 객관화시킬 수 있는 낯 선 여행지에서 발견한 것만으로도 팍팍한 일상에 낸 균열의 성과라 할 수 있겠다.
그 균열을 통해 시원한 통풍을 가능하게 했으니 여행은 곧 발견이며 창조인 것이다.
하루 여행으로도 이러한 발견과 창조가 가능하다니 여행의 위력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약간의 거리를 둔다
어머니는 집 주변 환경도 공기가 잘 통하는 곳이 좋다고 하셨다. 옛날 시골집들은 주변에 팔손이나무나 단풍, 자양화 등에 둘러싸여 있었다. 어머니는 매일같이 집 주변을 둘러싼 나뭇잎과 가지를 손질했다. 통풍이 나쁘면 집이 썩고, 그 집에 사는 사람도 병에 걸린다고 믿으셨다.
그 믿음은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깊이 뒤얽힐수록 서로 성가셔진다. 살다 보면 나를 끔찍이 싫어하는 사람이 한둘은 나오게 마련이다. 이를 피할 도리는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지나치게 관계가 깊어져 서로에게 어느덧 끔찍할 정도로 무거워진 덕분에 문제가 생긴다. 어머니 말씀처럼 사람이나 집이나 약간의 거리를 둬 통풍이 가능해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최소한의 예의인 듯싶다.
소노 아야코의 <약간의 거리를 둔다> 중에서.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책을 가지고 싶은 꿈을 꾼다. 나도 예전에 그런 꿈이 있어 글을 차곡차곡 썼던 적이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쓰기가 싫어졌다. 목표가 있는 글쓰기가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글 쓰는 것이 숙제 같고, 잘나지도 않은 내가 억지로 멋 부리는 것 같았다. 글 폼 잡느라 글엔 진심이 점점 희미해져 갔다. 내 꿈도 나이가 들수록 희미해져 갔다.
<오늘 하루 나 혼자 일본 여행>의 작가는 이런 정체기를 인내와 지혜로 잘 극복한 것 같다.
또한 글쓰기의 목표를 잃지 않고 꾸준히 쓰고 알찬 정보도 꼼꼼히 잘 정리해두어 하루 여행을 계획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려한다.
이래서 작가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닌가 보다.
갱년기의 나이로 접어드니 몸은 바쁘지 않은데 마음은 많이 고되다. 취업 준비하느라 바쁜 졸업반 딸 걱정, 수험생 아들 걱정, 연로하신 친정 엄마와 시어머니의 건강 걱정에 약해진 남편의 건강 걱정까지.. 내 하루 일상은 걱정으로 시작해서 걱정으로 마무리되는 것 같아 도대체 나는 어디에 있나 싶다.
나는 나도 배려하고 걱정해야 하는데 말이다.
여름방학엔 나도 "어느 날 문득 하루 여행"을 다녀와야겠다.
그때는 오롯이 혼자 여행을 할 것이다.
혼자 여행이니 일정을 맞출 고민도, 숙소 선택의 고민도, 취향 존중할 필요도 없이.. 그저 '나만 나를 배려하면 되는 여행'이 되리라.
육아와 살림으로 힘든 전업주부, 취업준비로 대학생활의 낭만을 포기한 대학생들, 매일이 전쟁터 같은 직장인들, 그리고 고3 수험생 아이 눈치 보는 나 같은 갱년기 직장인 아줌마 등등.. 일상의 균열이 필요한 이들에게 읽기를 권한다.
<오늘 하루 나 혼자 일본 여행>
부산 출발 에어부산은 "임박 특가 티켓"들이 많다. 이른바 땡처리 항공권 말이다. 국내 고속버스보다 싼 요금들이 있으니 당일 여행을 위한 티켓팅은 하루나 이틀 전날이 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