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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의 노래 May 13. 2016

<커튼 뒤에서 엿보는 영국신사>

#날씨만큼 복잡한 영국과 영국인, #타산지석 시리즈

‘사람들은 영국인들이 굉장히 폐쇄적이라 한다.
우스갯소리로 영국인들은 무인도에 떨어져도 소개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서로 통성명도 못할 사람들이라고 하지만, 외로운 영국 신사는 공통의 화제로 대화를 나눌 만한 틈만 보이면 다소 허무하게 허물어지는 경향이 짙다.
시간이 흐를수록 남에게 지나치게 관심을 보이는 영국인들에게 조금씩 지쳐갈지도 모른다.‘

주재원 아내로 영국에서 오래 생활한 작가의 말이다.

전통과 예절을 중시하는 영국인들이 이웃의 일거수 일투족을 커튼 뒤에서 지켜 본다니 처음엔 의아했다. 기실, 점잖은 사람들일 수록 겉과 속이 다를 수 있다. 평온한 겉을 만들기 위해서 속은 얼마나 치열해야 하겠는가 말이다. 내가 느낀 바로는 얌전한 일본인도 그렇고 점잖은 영국인도 아니, 국적을 떠나 저명한 학자도, 고귀한 성직자 역시 겉은 평온한 얼굴을 하고 세속의 것들에 관심 없어 보이지만, 알게 무엇인가..그들의 속은 누구보다 뜨거운 용광로 같을 수도 있고, 공감지능이 현저히 떨어지는 냉동창고일 수도 있으니.


제목에서 보듯이 영국의 신사 숙녀들은 겉으론 남의 일에 무관심해 보이지만 늘 옆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나 촉각을 곤두세우고 커튼 뒤에서 살짝 엿보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그들을 일컫는 말이 바로 ‘커튼 트위쳐스(Curtain Twichers)’ 이다.

처음엔 작가의 시선에 이입되어 ‘아, 참 별난 사람들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다가 우리는 커튼이라도 열어 볼 깜냥이나 있나 되돌아 본다. 세상이 서러워 죽음을 택한 이웃은 죽어서도 서럽다. 결국 시체 썩은내가 진동을 해야 신고하는 우리나라의 굳게 닫힌 문들을 보라.

나조차 이웃과 왕래가 없으며, 앞집 여자가 인사성이 없다는 이유로 어느 순간 나도 그 여자처럼 도도하게 고개만 까딱하고 냉랭하게 지낸다.

아, 그렇게라도 마주치면 다행이다.

윗집에 누가 사는지 아랫집에 누가 사는지도 잘 모를 때가 많다. 이사들은 또 어찌 자주 가는지 말이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나 살갑게 인사하며 대화를 나누는 이웃이 없다는 것이 나의  현실이다.

영국인들은 그래도 커튼 뒤에 숨어서 이웃의 동태라도 살피니 위급할 때 대신 신고해주고, 쪽지로 알려주고, 동네에 돌아가는 일들을 다 알고 있다니 일면 부러운 일이다.


이 책은 우리가 모르는 영국과 영국인들의 기이하고 특이하고 해괴한 면모를 보여준다.

세상에 취미가 ‘트레인 스포팅(Train Spotting)’이라는 것도 있다니 말이다.


영국 내의 기차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트레인 스포터를 만날 수 있다. 그런데도 굳이 런던의 클래펌 정션 역 9번 플랫폼을 찾은 것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세상이 무너져도 상관없이, 언제든지 그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클래펌 정션 역의 9번 플랫폼에는 언제나 고물 같은 망원경과 카메라를 목에 건 차림새가 비슷비슷한 영국인 몇 명이 무리 지어 있다. 그들은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황급하게 일어나서 심각한 표정으로 노트에 무언가를 열심히 쓴다. 그들이 기록하는 것은 그날 들어온 기차의 일련번호이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오는 기차들이 이 환승역에서 다시 길을 떠나듯 인간들도 이렇게 모였다 흩어진다는 것을 배우기 때문에 자주 찾는다.' 고 말하는 어느 train spotter의 말은 인간의 자발적 고독함이 그리 지루한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


하루 종일 기차역에 앉아서 지나가는 기차의 번호를 적고 몇 시에 통과한다는 메모를 꾸준히 하는 사람들, train spotters..

그들은 다 '백수'인가?  No!

트레인스포팅을 하기 위해 주말만을 기다리는 직업인들도 많고, 은퇴해서 본격적으로 트레인 스포팅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기차를 기다리고, 기차의 꽁무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망원경으로 지켜보고, 흐믓해 하는 그들에겐 모두에게 인정받는 일반적인 취미 따윈 필요가 없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그래서 내 시간을 아낌없이 할애할 수 있는 일이라면 타인의 인정 따위가 무어 중요하겠는가.

나는 정녕 내가 좋아하는 일에 내 시간을 얼마나 할애하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그것은 곧 삶의 열정이고 또한 여유다.

아, 나는 열정도 없고 여유도 없었구나..


읽으면서 고개도 끄덕이고, 내가 봤던 영국의 모습들을 떠올리며 갸우뚱 하게도 만드는 이 책은 내가 읽은 타산지석 시리즈 중 재미로 따지자면 단연 최고다.

작가의 재기 넘치는 글도 그렇고, 생생하게 살아 있는 리포트가 영국을 들었다 놨다 한다.

영국인을 까는 것 같으면서도 그들의 단점이 어떻게 장점이 될 수가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초등학교 저학년 체육시간에 아이들을 팬티 차림으로 수업을 받게 하는 것을 보고 작가는 까무러치게 놀랐지만 그 이유를 들으니 수긍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예의범절을 끔찍이도 여기니 아이들을 훈육하는 부모들 중에서는 도를 넘는 부모들이 많은 모양이다. 

그들은 말 그대로 전광석화처럼 아이들을 조용히 혼내는데 그 방법은 기상천외하다. 레스토랑에서 무언가를 요구하는 아이를 훈육한답시고 테이블 밑에서 아이를 심하게 꼬집어 식사 하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해지는 아이, 더 놀라운 건 부모가 무서워 눈물이 나도 울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 없는 데서 아이를 잽싸게 때리거나 학대수준의 체벌을 하는 부모들이 꽤 있어도 보이지 않는데서 일어나는 폭력이니 아무리 '커튼 트위쳐스'가 많아도 이를 신고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가정폭력이 많으니 초등학교 저학년 체육시간에 팬티 차림으로 수업을 하며 아이들의 몸에 멍이나 상처가 있지는 않은지 교사들이 체크를 한다는 것이다. 커튼 트위쳐스, 트레인 스포터즈, 그리고 팬티차림의 초등학교 체육수업과 그 이유.. 이것으로 영국인을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영국인의 자식에 대한 믿음이나 경청 태도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태국에 쓰나미가 덮쳤을 때 마침 휴가중이던 영국인 가족 중 10살 여자아이의 경고를 듣고 그 부모가 호텔 직원에게 말해서 모두를 대피시켰다는 일화에서는 그들의 경청 문화가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아이는 학교에서 쓰나미가 일어나면 바닷물에 어떤 전조가 일어나는지 배웠다고 한다.

마침 아이가 태국 휴양지 바닷가에서 놀다가 바닷물이 부글부글 거품을 내는 것을 보고 달려가 부모에게 쓰나미 경고를 했고 그 부모는 아이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 들였다. 나 같으면 어땠을까? 아이에게 알지도 못하면서 쓸데없는 호들갑을 떤다고 무시했을 것이 분명하다.


영국인은 천하에 둘도 없는 매너인들이면서 또한 변덕쟁이에, 훔쳐보기 선수에..이해하기 어려운 국민들이지만 섣부른 일반화로 영국인들을 폄하하거나 칭송하고 싶지 않다.  

영국은 어쨌거나 영국이다.

변하지 않을 그들만의 것을 지킬 나라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모든 것이 변화하는 이 시대에 변하지 않는 가치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진정 진화하는 것이 아닐까.


책의 일부분만을 소개했다.

감히 일독을 권한다.

이순미 글, 도서출판 리수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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