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함께 한 우동여행, 예술여행
미리애, 다카마쓰에서 자전거 타며 우동 여행하고 싶다.
나는 나오시마에서 안도 타다오의 건축 예술을 보고 싶다, 혜숙아.
그럼 우리 우동도 먹고 자전거도 타고 예술도 감상할까?
2017년 1월 3일 밤 11시 40분, 나는 창원발 인천공항행 심야버스에 몸을 싣고 있다.
버스를 타자마자 짜 먹는 멀미약을 꺼낸다.
이 고약한 맛의 짜 먹는 멀미약이 단시간에 잠자는 데는 직빵이다.
몇 년 전 장거리 비행에서 한번 먹어보니 진짜 비행기 안에서 계속 헤롱 거리며 잘 수 있었다.
그 후부터 장거리 여행 때 꼭 챙기고 다닌다.
무튼 심야버스에서 좀 자 둬야 다음 날 다카마쓰를 제대로 돌아다닐 수 있으니 컴컴한 심야버스 안에서 오만상 찡그리며 멀미약을 짜 먹는다.
손님 여러분, 인천공항입니다. 편안하고 안전한 여행 어쩌고저쩌고..
잠에 취한 채 새벽 4시 20분, 인천공항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을 듣긴 했는데 버스에서 내려 공항으로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간절히 바라는 것은 오로지 긴 의자.. 어디든 다리 펴고 잠시라도 누울 공간이 필요하다.
혜숙이가 공항에 도착할 시간은 6시 30분쯤이니 두 시간 정도는 얼굴만 가리면 아무데서나 드러누울 수 있는 배짱의 나는 지금 강력한 헤롱 상태이다.
그러나 젠장, 공항 의자에 다들 대자로 뻗어 주무시는 남성 여러분들 때문에 나는 한 귀퉁이에 쭈그려 앉아 배낭을 가슴에 꼭 안고 잠시 눈을 감고 있다.
으스스 추운 것 같아 잔뜩 어깨를 움츠렸는데 실은 춥지 않다.
춥지 않은데 추운 느낌은 슬프지 않은데 서러운 느낌과 비슷하다.
잠에 다시 빠질 것 같았는데 머릿속 희미한 구름이 걷히고, 잠 못 자 따갑던 눈이 조금씩 덜 따가워진다.
슬슬 정신을 차려야겠다.
아, 커피..
입 속이 후텁하고 캐캐 하다.
대여한 와이파이 도시락(?) 찾기 전에 양치질이 급하다. 괜히 양복 입은 저 총각에게 입냄새 풍기며 부산 사투리로 '와이파이 공유기 찾으러 왔어.. 요 오~' 라 하고 싶지 않다.
오늘의 내 패션은 뭐랄까, 컬러풀한 노숙자 패션이라고나 할까.
벙벙한 초록색 누비 원피스에, 뽀글이 검정 코트에, 연두색 펠트 모자를 썼다.
내 딴엔 무심한 듯 세심한 패션인데 글쎄다.. 새벽 인천공항에서 이 차림에 백팩 메고 어슬렁 거리며 세수하러 화장실에 가는 나 자신을 유체이탈한 듯 보고 있노라니 이 아주머니는 영락없는 노숙녀임을, 이것은 절대 과장되지 않은 셀프디스임을..
개운하게 양치하고 세수도 다시 하고 스킨, 로션 바르니 어쩜.. 얼굴이 막 그냥 다시 화사~하지 못하다.
얼굴이 누렇게 떴다.
짜 먹는 멀미약 탓이려니..
분당에서 새벽 4시 30분발 공항 리무진 버스 타고 오는 혜숙이를 기다리며 앉아 있으니 다시 잠 오고, 삭신이 쑤시고 배가 고프다. 아, 음식보다 더 간절한 커피 생각에 나는 미리 각성하여 나의 각성제를 찾아 파리를 향한다. 파리 크로와상이 바로 저기에 있다.
샌드위치와 뜨거운 커피를 앞에 두고 노숙녀 모드에서 다시 제정신을 탑재하여 여행자 미리애로 돌아온다.
'그래, 여행은 좋아서 하는 고생인 거지. 그래도.. 심야버스는 안 되겠다..'
기실, 쉰살녀 문여사에게 심야버스는 과도하다.
마음이 젊다는 것은 간혹 자기기만이다.
다카마쓰는 한적한 소도시이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별로 없다.
외관은 도시가 맞는데 이 허전한 느낌은 무엇인가.
다카마쓰가 속한 카가와현의 옛 지명은 '사누키'라고 한다.
"사누키 우동"의 사누키는 우동으로 유명한 고장의 이름인 것이다.
배고픈 친구와 나는 아무 데나 들어가도 맛있다는 우동이 열렬히도 먹고 싶다.
그러나 게스트하우스를 찾는 중에 만난 과하게 친절한 주민으로 인해 우리의 시간은 꼬이고 만다.
똑똑해 보이는 혜숙이와 나는 어리바리한 다카마쓰 여자에게 끌려 다니며 두 시간을 날린 것이다.
에잇, 바보들..
JR열차를 타고 '우다츠'라는 곳에 간다.
옛날 가게와 오래된 주택 골목으로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는 그곳엔 맛있는 우동집도 많으리라.
혜숙이는 기차역에서 '에키벤'을 꼭 먹고 싶었다며 도시락을 하나 산다.
'에키'는 역이란 뜻이고 '벤'은 벤또의 줄임말이니 '에키벤'은 역에서 산 도시락을 기차 안에서 먹는 것이다.
일본 여행의 테마 중엔 에키벤 여행도 있다고 하니 여행의 재미는 이렇듯 찾기 나름이지 않겠나.
허기진 두 여자는 에키벤을 새초롬히 후딱 먹어 치운다.
We are still hungry..
곧 우동으로 빈 공간을 빈틈없이 채워 넣어야지..
Ooooooops!
'우다츠'는 우리가 생각했던 우다츠가 아니다. 뭔가 이상하다.
관광객으로 가득해야 할 거리도, 옛 냄새 폴폴 풍기며 호객을 하는 상점들도, 오래된 주택의 골목들도 없다.
그러나 혜숙이와 나는 곧 '우다츠'라는 우동집을 발견하곤 여기가 우다츠라는 확신을 갖고 골목들을 돌아다닌다. 뭔가 잘못됐다.. 생각만 하면서 이 골목 저 골목을 기웃거리다 우동집에 들어가서 감탄을 하며 우동을 맛있게 흡입한다.
숙소로 돌아와서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인 와카바야씨와 대화 중에 알게 된 사실은 이러하다.
우리가 찾고 있는 옛 거리로 유명한 우다츠는 '우타쯔'라는 발음의 (발음으로는 구분하기 힘든) 기차로 두어 시간 가야 하는 '도쿠시마현'에 있다. 와카바야씨에게 우다츠에 가고 싶다고 위치를 물었을 때 그는 우리가 유명한 우동집인 우다츠에 가고 싶어 하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뭐, 우다츠든 우타쯔든 우리는 유쾌한 에너지를 가진 우동집에서 맛있게 우동을 먹고 왔으니 되었다.
옛날 골목을 찾아다니며 만난 덜 옛 골목도 충분히 좋았다.
다카마쓰에서 나오시마까지는 배를 타고 한 시간 남짓 걸린다.
아침 8시 20분 배를 '결론적으로' 말하면 탔다.
'결론적으로'에서 긴박했던 영상이 휙 지나가는지.
가벼운 혜숙이는 달리고, 무거운 나는 상체만 우선 달린다.
많은 말들과 에피소드 대신 결론적으로 배를 탔다는 것에 방점 하나 찍어두자.
무료 셔틀버스로 나오시마 섬을 둘러보려던 계획은 나오시마에 내리자마자 자전거 여행으로 급변경된다.
가보면 안다.
이 섬의 매력이 얼마나 깊은지.
섬에 내리면 먼저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인 노란 점박이 호박이 여행객들을 반긴다.
나는 '쿠사마 야요이' 작품을 제주 본태박물관에서 봤었다.
제주의 본태 박물관은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곳이다.
야요이는 강박적으로 같은 패턴을 표현한다. 바로 원이다.
본태 박물관 특별 전시장에서 수천수만 개의 동그라미 속에 있자니 나도 미치는 것 같았다.
무튼 나오시마 항구의 랜드마크가 된 야요이의 작품을 보니 반갑긴 하다.
아, 근처에 더 큰 빨강 점박이 호박도 그대를 기다린다.
나는 자전거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10살, 11살 때인가, 동네 점방집 두 발 자전거를 점방 아저씨한테 조르고 졸라 신작로에서 타 본 것이 전부다.
그것도 탄 지 10분 만에 작은언니한테 걸려서 된통 혼났다.
간댕이 크다고 언니한테 머리를 몇 대나 쥐어 박혔다.
그로부터 40년 후 일본 어느 평화로운 섬에서 자전거 여행을 한다며 자전거에 올랐다.
풍랑을 만난 것처럼 좌우로 비틀거리지만 삼보일배(?)의 정신으로 조금씩 가긴 한다.
그러나 오르막에선 맥도 못 추며 비틀거린다.
전동자전거라 그나마 다행이다.
내 삶의 오르막에도 모터가 있으면 좋겠다.
중심 잡기조차 힘들지만 넘어지고 쪽 팔리고를 몇 번 하니 제법 달려진다.
제대로 중심 잡으며 풍경 감상이 가능할 때는 섬 투어를 마칠 때쯤이라는 것이 유감이다.
'안도 타다오'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는 지추 뮤지엄에서는 클라우드 모네, 제임스 터렐, 월터 드 마리아 등 세 아티스트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아니 네 명이라고 해야 맞겠다.
지중(땅 속)에 미술관을 지은 '안도 타다오'를 건축가로만 규정짓기란 애매하다.
지추 뮤지엄 자체가 예술이다.
월터 드 마리아의 작품 [Time, Timeless, No Time]의 압도적인 구(球)를 보니 우주의 신비와 외계의 힘 같은 것이 느껴진다.
천장에 뚫린 직사각형 공간을 통해 보이는 하늘은 태양과 원이 만나는 각도와 보는 이의 위치에 따라 투영되는 모양이 다르다.
제임스 터렐의 [Open Field]의 빛은 오묘한 힘을 발한다.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계속 끝없이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빛이 공간을 만드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찰나의 예술적 감흥을 몇 줄 말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한 부스에 한 번에 관람객 두 명 이상을 들이지 않는 시스템이라 작품에, 작품을 느끼는 내 감정에, 더 집중할 수 있다.
루브르에서 모나리자를 봤을 때는 그저 익히 알고 있는 그림을 잠시나마 내 눈으로, 전쟁하듯 밀리며, 봤다는 기억 한 컷으로만 남을 뿐이다. 이리저리 밀리고 밀면서 본 명화를 가슴에 담기가 쉬운가.
*사진 촬영이 금지된 곳이라 대신 엽서를 샀다.
엽서는 빛이 시간과 공간을 만날 때의 조화와 변화 등을 담아낼 수 없기에 심히 심심할 뿐이지만.
특히 터렐의 작품을 보여주는 엽서는 무척 유감스럽다.
와카바야 게스트하우스에서 2박을 했다.
나오시마에서 우연히 만나 짧은 대화를 나누었던 미국인을 게스트하우스 주방에서 설거지하다 다시 만났다.
나도 놀라고 그녀도 놀란다.
"What a small world!"
3주 일정으로 일본의 조용한 도시들을 여행 중이라는 샌프란시스코 여성인 '쉴라'는 traditional과 shrine 이란 단어가 지겹다며 이 두 단어의 조합 없는 조용한 마을을 한 군데 더 간 다음 귀국할 예정이라고 한다.
와카바야씨가 '구라시키'란 곳을 추천해준다.
흠.. 구라(친)시키로 외우기 딱 좋다.
친구가 방에서 회사일을 처리하는 동안 나는 쉴라와 주인장 와카바야씨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젊은 주인장은 영어, 프랑스어, 몽골어 그리고 한글 읽고 쓰기가 가능하다고 한다.
주로 각자가 다녀온 여행도시 이야기를 했는데 와카바야씨가 몽골과 세네갈에 봉사단원으로 몇 년간 있었다는 대목에서 나는 그만 깨갱 깽이다.
그는 아프리카 세네갈에 있을 때 프랑스어를 배웠고 대학시절 거의 방학마다 몽골에 가서 봉사활동도 하고 친구들도 사귀며 몽골어를 익혔다고 한다.
게스트하우스를 하는 이유는 가족과 한 공간에 있으며 경제활동을 하고 싶어서라고.
여행자들과 이야기하면서 세상을 간접적으로 알아가는 것도 삶의 재미라고 한다.
젊은 친구가 참 기특하다.
여행 와서도 회사일 때문에 바쁜 혜숙이에게 어느 정도 혼자 있을 시간을 주기 위해 주방에 내려갔지만 오히려 이들과 얘기하다 친구를 너무 혼자 둔 것 같아 슬며시 방에 들어와 혜숙이와 자분자분 대화를 시작한다.
돌아다닐 땐 대화할 시간이 별로 없었는데 다다미방에 누워 두꺼운 이불을 덮고 눈 감은 채로 있으니 마음이 포근해져 얘기가 끊임없이 흐르고 시간은 속절없이 직진 중이다. 시간아, 멈추어다오.. 란 노래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의 대화 주제는 자잘한 것에서부터 시사적인 것까지 수 백가지가 넘지만 결론은 늘 하나다.
우리.. 오래오래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자.
그리하여 훌쩍 세월이 흐른 후에도 여유로운 마음과 빵빵한 지갑으로 둘이 또 여행 도모하자.
아, 결론은 결국 돈 많이 벌자.. 인가.
아쉬운 2박 3일의 여정이 끝나고 다시 한산한 다카마쓰 공항이다.
혜숙이와 인천공항에서 작별한 후 나의 험난한 여정이 다시 시작된다.
버스 타고 김포공항으로,
김포에서 김해공항으로,
김해공항에서 장유로..
다카마쓰는 우동 먹으러 또 가고 싶지만 아무래도 김해공항에 직항이 생긴 후에나 가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