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간을 포장해드립니다
엄마의 일생을 책으로 엮어주겠다며 포부 넘치는 약속을 한 지 3주가 지났다. 더 이상 숙제를 미룰 수 없다는 생각에 펜을 꺼내 이리저리 돌려보며 시작했지만 쉽지 않은 작업임을 알기에 답 없는 고민만 늘어갔다. 위인전처럼 몇 년도 어느 지역 출생인지부터 쓰는 방식은 정보전달 같은 딱딱한 구성일 것이고, 스토리로 풀어내자니 생각보다 내가 엄마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었다. 조금이라도 아는 이야기는 어떻게 엮어내야 하는지 모든 것들이 막막했다. 나름 참고해볼 만한 책을 많이 찾아봤지만 노력 부족 탓인지 와닿는 참고서를 발견하지 못했고, 오로지 나의 의지와 열정만으로 풀어나가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도 현실은 현실. 열정만으로 쉽게 될 리가 없다. 글로 써보려니 공부하기 전 필통 정리처럼 괜스레 1인칭 주인공, 3인칭 관찰자 같은 소설의 시점만 찾아보게 된다. 어렵게 느껴지니 하기 싫어지는 기분이 들고 자꾸 주변의 다른 것들에만 눈길이 가 자꾸 삼천포로 빠져버렸다. 푸념은 여기까지, 정말 엄마에 대해 어떻게 써볼까? 엄마가 들려준 당신에 관한 이야기와 내 기억이 영화 필름처럼 촤라라락 지나가는데 이걸 어떻게 정리해야 깔끔한 스토리가 나올까?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모습을 조각조각 모아 얘기해보며 내용을 검증하고 그때그때 덧붙여질 또 다른 이야기를 함께 정리하는 과정을 거쳐야겠다.
세상의 소금형
요즘 유행하는 mbti를 소재삼아 서문을 열어가는 게 딱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단번에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대표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ISTJ, 말하자면 엄마는 신중하고 조용하며 집중력이 강해 매사에 철저하고 사리분별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반복되는 일상적인 일에 대한 인내력이 강해 조직적이고 침착하며 자신과 타인의 감정, 기분을 배려하고 위기상황에서도 안정되어 있다. 처음엔 너무 AI 같은가 싶었지만 엄마 소개글로 간단명료하게 쓸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표현이다.
엄마는 서울에서 다니던 직장이 지방 이전하면서 내가 태어난 곳으로 이사를 했고 매일 장거리 출퇴근을 했다. 다행히 회사 셔틀버스가 있어 편리하게 이용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장시간을 도로에서 보내는 일은 쉽지 않다. 토요일 반나절 근무가 있던 시절, 그 버스를 타고 혼자 친척집에 종종 갔었는데 두 장(거리, 시간)이 주는 지루함과 불편함은 당장이라도 탈출하고 싶은 감옥 같은 곳이었다.
달리 방법이 없었는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고 사는 것이 최우선이었는지 이런 과정 속에서 엄마는 본인의 삶도 열심히 살아나갔다. 출근 전엔 수영, 골프 등 운동을 하고 퇴근 후엔 대학원을 다니며 논문도 집필했다. 엄마에겐 24시간이라는 시곗바늘이 느리게 흘러갔나 싶었지만 나중에 들어보니 하루 2시간 수면인 날이 빈번했다고 한다. 새벽 어스름에 문틈으로 들어온 서재 불빛과 타닥타닥 들리는 타자 소리는 나의 단잠을 자주 깨웠다. 엄마는 그 시간에 내가 같이 공부하며 학생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길 원했지만 그 당시 꼬꼬마였던 나에겐 절대 불가한 일이었다. 지금으로선 아쉬움이 많이 남는 부분이다.
직장인으로서의 엄마는 직위와 각종 상장, 상패, 그리고 아직까지도 이어지는 후배들의 연락으로 모든 것이 설명된다. 가보로 보관할만한 각종 결과물들이 집에 전시되어 있는 모습을 보면 내가 더 뿌듯했고, 먼 친척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선후배 이모, 삼촌들의 사랑을 받아 여러모로 엄마의 후광을 내 것 인양 누렸었다. 내가 직장 내에서 겪고 있는 어려움을 털어놓으면 따뜻하면서도 시원하게 느껴지는 조언이 쏟아지고 40년 가까이 되는 사회생활 선배의 내공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내가 태어난 1989년 이후 엄마의 삶을 간단히 소개하는 글로 첫발을 내디뎌보면서 밑그림의 윤곽이 점점 드러나는 느낌이다. 앞으로 엄마, 아내, 직장인 등 엄마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타이틀을 알록달록한 색깔과 균형 있는 모양의 그림으로 빈 캔버스에 채울 수 있겠다는 기분이 든다.
세상에 없으면 안 될 만큼 가치 있는 것을 언급할 때 흔히 '빛과 소금'이라는 말을 쓴다. 모양은 단순하지만 나트륨, 염소가 만나 체내 삼투압 유지라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백색의 결정체 소금. 작지만 다양한 역할로 누군가의 삶에 힘이 되어주었을 단단한 존재. 그 시간을 음미하며 엄마 인생의 단맛, 짠맛, 쓴맛을 정성껏 기록해나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