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새로운 일상의 잉태
휴가철이다. 코로나가 터지기 전엔 매년 친구와 해외여행을 다니며 휴가를 보냈지만 요즘은 운전면허증과 함께 국내여행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이번엔 어린 시절의 방학을 회상하며 가족들과 짧지만 알찬 여행을 다녀왔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그간 쌓여온 이야기를 나누며 오랜만에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고 온 시간이었다. 직장 탓에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 평소 퇴근 후 매일 통화를 하지만, 얼굴을 마주하며 나눈 대화는 사과가 그려진 기계에 불어댄 목소리보다 깊고 따뜻하다.
가족과 휴가를 보낸 이유는 또 있다. 얼마 전부터 느낀 피로가 회복되지 않아 가족의 품으로 들어가야만 나아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흔히 30살이 넘어가면 꺾인다고 표현하는데 당시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느끼지 못했고, '30살 별거 아니네?' 라며 무심하게 지나쳤었다. 그리고 33살이 된 올해, 꺾인다는 의미가 이런 건가 싶을 정도로 상반기를 너무 힘겹게 보냈다. 그간 쌓여온 직장 스트레스 때문인지, 나이가 주는 성장통인지, 날이 더워서인지, 일상에서 받는 여러 고민들 때문이었는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난생처음 느껴보는 무력감에 어떻게든 벗어나 보려고 몸부림쳤다.
어지간한 것들은 무시하거나 무덤덤하게 받아넘기는 성격이었는데 이번엔 확실히 달랐다. 피곤해서 그렇겠지라고 넘긴 날들은 갈수록 텀이 짧아졌고, 아침마다 하던 운동, 주말여행, 소소하게 즐겼던 모임 등 평소 일상처럼 해왔던 모든 것들이 부담으로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한 번도 건강검진 성적표에서 '수'를 놓쳐본 적이 없었건만 이번에 받은 결과표는 기분 탓이 아니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적잖은 충격이었다. 검진 전부터 컨디션 난조로 야근, 운동, 술자리 등을 줄이기 시작했지만 완전한 내려놓음이 아니었는지 아니면 그동안 축적된 스트레스 양이 많아서였는지 내려놓은 효과는 전혀 느끼지 못했고 당연히 회복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스트레스는 받아온 기간의 두 배는 쉬어야 풀린다는 주변의 조언을 듣고 몸부림치던 노력도 내려놓기로 했다.
일찍이 제출했던 휴가 계획이 어쩌다 보니 적절한 타이밍에 시작되었고 대체공휴일까지 생기면서 운 좋게도 긴 기간을 마음 편히 보내고 있다. 좋아하는 것들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휴가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그런 것들까지 내려놓다 보니 어색했지만 이런 게 진정한 쉼인가 싶었다. 지금의 상태에 이르게 된 이유를 하나씩 찾아보게 되었고 생각만으로도 복잡했던 매듭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평소에도 힘들면 쉬어가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했는데 그저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려왔나 싶어 스스로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이제 마음만 청춘인 삶이 시작되는 건 아닌가 하는 슬픈 인지 속에 휴식의 의미를 다각도로 생각해본 일주일이었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을 인상 깊게 읽어서인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문구가 있다. 여름은 가을을 잉태한다. 세월의 연속성과 생명력, 미래에 대한 희망이 느껴지는 표현이었다. 휴가도 마찬가지다. 쉬면 열심히 살아갈 힘을 얻고 대가로 또 휴식을 보낼 수 있다. 둘의 반복은 무용한 시간이 아니라 또 다른 일상과 휴식을 만들어내는 의미 있는 과정이다. 서로가 필요충분조건이 되는 관계 속에서 쳇바퀴를 넘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며 내일을 기대하게 만든다. 일련의 과정을 생각하면 다음 휴가를 열심히 기다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