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w or Never
지난 부처님 오신 날, 지인들과 라이딩을 하면서 언제까지 자전거를 이렇게 자유롭게 탈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가능할 때 원 없이 타고 추억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에 특별한 여행이 하고 싶어 졌고 갑작스레 제주 라이딩을 추진하게 되었다.
여행 전날 출장으로 삭신이 쑤셔 쉬고 싶었지만 사무실 나와 잔업무들을 처리하고 제주 라이딩 후기를 찾아보았다. 준비과정에 느껴진 설렘과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부담감이 교차하면서 고민이 깊어져 갔다. 다녀오면 개운하고 뿌듯함을 느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매번 장시간 소요되는 운동은 화장실 가고 싶은 기분처럼 이상하게 회피하려는 심보가 생긴다. 압박으로 느껴지는지 뒷걸음질치고 싶은 기분이다.
다행히 친구의 도움으로 맘 편히 공항에 와서 수화물을 부쳤고, 짐이 옮겨지는 모습을 보니 안전을 최우선으로, 후회 없이, 사실상의 완주를 하고 오자는 다짐을 굳게 하게 되었다. 하지만 긴장한 탓인지 밤잠은 설쳤고 다음날 멍한 상태로 주섬주섬 장비를 하나씩 챙기기 시작했다. 탄수화물로 연료통을 채우고 숙소에서 출발점까지의 첫 일정을 시작했다. 가는 길에 본 일출은 잊지 못할 장관이었지만, 초행길을 차가 아닌 자전거로 혼자 지나가야 한다는 부담과 갑자기 먹통이 된 가민은 자린이인 나에게 긴장의 연속이었다.
용두암 인증센터에서 첫 도장을 찍고 해안가를 따라 달리기 시작하니 제주도에 왔다는 것을 실감했고 동시에 긴장감도 완화되었다. 인증센터마다의 거리는 평균 2-30km여서 234km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고 눈 앞의 다음 코스만 생각하며 달려 나갔다. 작은 점들이 모여 선이 되고 원이 그려지듯 조금씩 굴려간 바퀴는 1일 차 목표였던 140km 지점인 쇠소깍인증센터에 나를 생각보다 빠르게 데려다주었다. 송악산과 법환바당을 가는 길에 만난 제주의 바람이 많은 체력을 앗아갔지만 이 또한 여정의 일부라 생각하며 쉼 없이 달려 나갔다.
틈틈이 간식으로 보급하고 현지 맛집에서 점심도 먹으며 연료통을 잘 관리했지만 성격상 빨리 도장을 채우고 끝내버리고 싶은 마음이 커져가서 인지 당일 종주가 가능할 것 같은 욕심이 계속 생겨났다. 하지만 열정 가득한 마음만으로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최대한 이성적이고 객관적으로 상황을 판단하며 라이딩을 이어갔다. 성산일출봉에 도착했을 때 남은 65키로를 두고 고스톱을 고민했고 결국 현실과 타협했다. 아무리 서포트해주는 여행 메이트가 있었더라도 나의 욕심만 채울 수는 없었고, 혼자 말뚝으로 장거리를 타보니 허리에 무리가 와 1일 차 라이딩을 정리하고 다음 여정을 진행하기로 했다.
둘째 날 친구와 일상적인 여행을 즐기며 많은 추억을 남기고 다음 날 성산일출봉에서 남은 라이딩 여정을 시작했다. 숙소 나설 때부터 바람이 범상치 않음을 느꼈지만 안장에서 몸소 체험한 바람은 새드엔딩을 절로 연상하게 했다. 나중에 자전거 포장업체 사장님을 통해 들어보니 그날의 바람은 소형 태풍급으로 속력이 15만 나와도 잘 탄 거라고 말씀해주셨다. 하지만 2일 차의 짧은 거리를 좋은 기록으로 마무리해보려 했던 나의 다짐에는 그저 아쉬운 위로일 뿐이었다.
바람에 날리는 모래와 먼지가 노출된 피부 곳곳을 날카롭게 때렸고 아침을 먹지 않아서인지 보급만으로는 힘에 부쳐 쉴지, 포기할지, 계속 갈지 내적 갈등을 정말 많이 했다. 쉬어가려던 카페들은 오픈 전이고, 자전거길을 이탈하는 일은 빈번해지고.. 일정 중 계획했던 것들이 이상하게 풀리지 않는 느낌이 계속 들었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 생각하며 손, 발에 쥐가 나도록 페달링을 이어나갔다.
출발점 겸 도착지인 용두공원에 와서 종주 인증을 기다리는 동안 힘들었던 기억은 땀과 함께 증발되어 날아갔다. 4만 번째 인증이라는 숫자는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 종주를 다녀갔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고 인증마크를 보며 수첩의 다른 종주길도 채워나가야 하나 잠시 고민하게 되었다. 환복 후 근처 카페에서 배를 채우고 라이딩 기록을 정리하며 창 밖의 바다를 감상했다. 나와 자전거를 잡아먹을 것 같던 거센 파도가 한없이 고요하게 보였다. 바다의 파도가 투명한 유리창 하나로 달리 해석되며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이상한 결론으로 여행을 마무리지었다.
제주환상자전거길의 파란선을 따라 여행하는 건 라이더뿐만이 아니었다. 각기 다른 배낭을 메고 올레길을 걷던 수많은 사람들, 마라톤 코스를 뛰던 사람들.. 도로 옆 에메랄드 빛 해변에서는 각종 포즈로 추억을 남기는 사람들이 있었고 모두가 라이딩 중 즐겼던 소소한 볼거리였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제주를 즐기는 모습을 보니 삶의 다양성이 주는 풍성한 기운이 느껴졌다.
수첩에 찍힌 도장과 종주 기록은 아직도 실감 나지 않는다. 잡다한 생각과 불평불만 없이 달리는 그 자체에만 집중했던 것 같다. 경험과 추억은 또 다른 도전을 꿈꿀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아닐까 싶다. 도전은 지금, 몰입이 주는 즐거움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