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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리스 Nov 12. 2020

나의 이야기

아버지를 천국으로 보내드렸다

아래 글은 나의 아버지를 추모하며

셋째  사위인 나의 남편이 쓴 글이다.


# 나의 장인 어른
삼광 배승준 장로!
향년 79세로 별이 되다.

금요일 밤 아버님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몇년 전 대장암 수술을 받고
혹독한 항암치료의 후유증으로
몇번의 위기 상황을 잘 이겨내셨지만
이번엔 힘들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소식을 듣고 상심한 아내에게
이번에도 잘 이겨내실 거라는 위로의 말을 해주진 못하고 아버님이 가실때가 된 것 같다는 말을 무심코 내뱉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서둘러 아버님이 입원중인
대전 성모병원으로 내려가던 고속도로 위에서
오전 11시 경에 아버님이 임종하셨다는 비보를 들었다.
의사가 이미 사망판정을 내렸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차 안에서 들은 아내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쉬지말걸
그랬다며 오열했다.
자녀로서 아버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지켜드리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순식간에 밀려왔다.
30분만 일찍 도착했어도
아버님의 임종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지금까지 부모님께 효도한 것도 별로 없는데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불효했구나...

아버님은 그렇게 햇살 따뜻한
11월 7일 토요일 눈부신 아침에 돌아가셨고
아버님 살아 생전에
당신께서 직접 조성해 놓으신 고향땅
선산 가족 묘소에 11월 9일 월요일 아침에
흙으로 돌아가셨다.
하관 예배중 물야교회의 원로장로님이
대표기도를 드리는 동안
세찬 바람이 몰려왔다.
그러나 그 바람은 매서운 칼바람이 아니라
오순절 성령세례처럼
가슴이 시원해지는 바람이었다.

모든 장례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차분한 마음으로
장례식을 치르며 느낀 소회들을 정리해보고
아버님에 대한 추모의 글을 써본다.

아버님의 호는 삼광이다
아버님의 친구분이 지어주신
이름이라고 들었다.
문자적으로는 세 개의 빛이고
화투의 삼광이 언뜻 떠오르겠지만
아버님의 삶을 반추해보며
나는 아버님이 세 개의 별로
자녀들의 마음에 남을 것이라 생각한다.

첫번째는 세상의 모든 아버지가
다 그렇겠지만
훌륭한 아버지로 살다가셨다.
1942년 대한민국이 일제의 식민지이던 암울한 시절에 태어나셔서
어린 시절에 8.15 해방과 6.25 전쟁같은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통과하며
희망과 고통, 가난과 혼란의 시절을 보내고
1959년 어머님과 결혼하여
슬하에 2남4녀의 자녀를 낳으셨다.
가난한 농부였지만
일찌기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아
어려운 형편가운데도
6남매 모두를 대학까지 보내셨다.
또한 믿음의 부모로서
자녀들을 말씀과 기도로 양육하여
우리 가정을 제외한 6남매 모두가
목사, 사모가 되었고 사위 며느리,
손자 손녀까지 한 가문에서
11명의 주의 종들을 배출하였으니
과히 믿음의 아버지라 할만 하다.
지금도 처갓집을 들를때마다
자녀들을 위해 축복기도주시던
아버님의 낭랑한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아버님은 평생 가난한 농부로 사셨기에
자녀들에게 변변히 남겨주신 유산은 없지만
가장 중요한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셨기에
6남매 모두 아버님을
별과 같은 분으로 기억한다.

두번째는 첫번째 내용과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아버님은 믿음의 사람으로 살다 가셨다. 아버님의 약력을 보니 19살부터 물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이듬해 세례를 받고 스물 두살에 집사로 임직하셨다고 하는데 안수집사를 말하는 듯하다. 마흔 하나에 물야교회 장로로 취임하여 30년간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기시고 은퇴하셔서 원로장로가 되셨다.
주일학교 교사로, 부장으로 얼마나 많은 믿음의 제자들을 길러냈을까?
장례식장에도 아버님을 기억하는
아내의 친구가 수십년 만에 찾아와
문상을 했다.
나는 나의 장례식장에 믿음의 스승으로
나를 기억하며 찾아와 줄 믿음의 제자가 있을까 생각하면 아찔하다.
나도 아버님을 생각하며
더욱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해본다.

마지막으로 아버님의 인간적인 면모를 고찰해보고 싶다. 우리 아버님 세대의 많은 분들이 그러했겠지만 아버님은 초등학교 밖에 졸업하지 못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총명하고 재주가 비범하신 분이셨다. 초등학교 6학년때 전국 어린이 글짓기 대회에서 입상하여 소파 방정환 선생님의 칭찬을 받으실 정도로 글쓰기 솜씨가 뛰어나셨다.

그러나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위로는 연로하신 어머님을 봉양하고
일찍 돌아가신 아버님을 대신하여
4명의 동생을 건사하며
6명의 자녀들을 양육하기 위해서
일치감치 자신의 학업과 꿈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젊은 날에는 돈을 벌기 위해
강원도 탄광에서 석탄을 캐기도 하고,
물야면에서 중국집을 운영해보기도
하였으나 벌이가 그리 좋지 못하여
말년에는 사과 농사를 지으셨다.
말하자면 나는 과수원집 셋째딸과
결혼한 것이다.

과수원집하면 웬만한 여느 농가보다는
부유할 것 같지만
우리 아버님께 평생 가난의 굴레를 벗지 못하셨다.
대장암 수술을 받은
요몇년 전까지도 그렇게 고된 사과 농사를
지으셔야만 했다.
친한 교회 집사님이 복숭아 농사를 지으셔서 몇번 과일 봉지싸기를 하러 가봤는데
내 인생중에 가장 힘든 날 중의 하루였다.
아버님은 이 힘든 일을 힘에 부칠 때까지 하시다가 암에 걸려 수명이 단축되신 것이다.

그러나 아버님은 힘든 농사를 지으시면서도
주경야독으로 책읽기와 글쓰기에 힘쓰셨다.
초등학교 졸업의 학력이지만 명문대학 출신의 석박사보다 글솜씨와 학문이 뛰어나셔서
기독 신보나 봉화문화원에서 출간하는 정기잡지에 많은 글을 기고하셨다
배씨 문중의 족보 뿐만 아니라 한국의 주요 문중의 족보를 감탄이 나올만큼 꿰고 계셨고
지역 사학자로 특히 봉화지역의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셨다.
고희 즈음에는 살아온 삶을 반추하시면서 당신이 평생 살아오신 고향마을에 대한 역사를 정리한 불기마을 이야기란 책을 봉화문화원에서 출간하셨다.

아버님의 삶은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부유하고
그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후로는 그를 위하여 금면류관이 예비된 믿음의 삶이었다.

한 아버지로, 남편으로, 형님으로, 오빠로,
장로님으로, 문필가로, 역사가로, 서예가로
훌륭한 삶을 삶을 살다가
돌아가신 삼광 배승준 장로님께
이 글을 바칩니다.
편안하게 안식하소서!#


딸인 내가 써도 이보다 더 잘 쓸 수 없을 듯 하여 이 글을 기록해놓음으로 아버지를 추모하려고 한다.


흙에서 와서 결국 흙에 묻히신 아버지.

그 영원한 단절이 아직은 잘 실감나지 않고

그 잔상이 계속 남아 때때로 눈물 짓게 하겠지만..

그러므로 더욱 아버지가 더 이상 살지 못하는

 이 세상에서의 삶을 더 충실히, 의미있게 살아가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날이다.


젊은 날의 아버지. 탄광에서 일하시고 밤에는 글을 써서 벽을 온통 본인의 글씨로 채워 놓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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