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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리스 Nov 15. 2020

내 이야기

아버지를 보낸 후

피로가 풀리지 않는다.

장례식이 끝난지 며칠이나 지났는데..

단순히 3일간의 장례를 치르느라 몸이 피곤해진 것이 안풀리는 것인지, 아님 감정의 무게에 눌려 몸이 편하지 않은 것인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될 수 있으면 쉬려하고 시간만 나면 잠을 청한다.

먹고 나면 곧장 졸리니...먹고 자고 먹고 자고..

장례식 치르고 온 사람이 통통하니 살이 붙었다고 흉보지나 않을지...


사실 아버지에 대한 정이 깊진 않았다.

아버지는 그냥 나에게 어려운 분.

나는 아버지에게 그저 여섯 자식 중 가장 눈에 안띄는 자녀 중 하나.

그 정도 사이였던 것 같다.

나의 아버지는, 지난 글에도 써 있듯이 배움에 대한 욕구가 컸었고 또한 많이 배워 뭔가를 크게 이룬 사람을 좋아하셨다.

늘 책상 앞에 앉아 이 분야 저 분야 공부를 하는 아버지를 보고 사람들은 제대로 배웠으면 뭐라도 한자리 크게 했을거라고들 했다.

50이 넘어 이대 박사과정에 들어간 둘째딸을 그렇게 대견해하시며 동네방네 자랑을 하고 다니셨는데, 결국은 학위 취득을 보지 못하고 가셨다.

언니는 이제 아버지도 안계신데 박사과정 관둘까... 라고 얘기할 만큼 아버지의 기대는 부담이 되기도 했고 동력이 되기도 했다.


나로 말할거 같으면 딸 둘, 아들 둘의 이상적인 가족에서 단지  아들 하나를 더 얻고싶다는 아버지의 바램으로 태어난 사람이다.

임심한 엄마의 모습이 딱 아들 가진 임산부의 모습이어서 당연히 아들이 태어날 줄 알았는데 막상 딸이 태어나니 그 서운함에 두번 보지도 않고 나가버리셨다니...나는 참으로 환영받지 못한 생명이었다.

내 나이가 호적상으로 1년이 줄어있는데 이번에 상속문제로 서류를 떼면서 보니 71년 9월에 태어난 아이를 73년 4월에 신고를 하셨다.

아버지께서.

1년 반이나 지나 신고를 하니 면사무소에서는 당연히 전 해인 72년에 태어난 줄 알았겠지.

넌 틀림없이 돼지띠다 하시며 72년 9월로 호적에 올라있지만 당당히(당연히?) 71년 생들과 학교를 같이 다녔다.

그때는 서류보다 우기는게 장땡이었는지..

하여간 여러가지가 미스테리한데..

다음에 엄마를 만나면 왜 1년 반이나 늦게 출생신고를 했는지 물어봐야겠다.


아들 하나 더!!  대신 나온 별볼일 없고 기대할것도 없는 다섯째 아이였지만 그나마 미움을 덜 받은건 공부 잘하는 바로 위 언니를 따라하느라 열심히 공부해서  그럭저럭 나온 성적 덕분?

물론 니 언니는 잘하는데 니 성적은 이게  뭐냐 하는 지청구는 듣지 않았지만 그래서 역시나 나는 공부를 잘해도 그 언니에 그 동생이니까 당연한 것이었다.


그나마 또 다행이라면 어릴 때

달덩이처럼 동네가 훤하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하얗고 포동하게 생긴 생김새 덕분?


또 하나는 학벌에 대한 아버지의 욕구를 채워줄 명문대 출신 세째 사위?

물론 그 세째 사위가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하진 못해 아버지의 교만해짐(?)을 조금은 방지할 수 있었어서 나로 말하면 오히려 감사하는 부분이다.

(나 불효년가?)


평소에, 엄마한텐 아무런 부담이 없지만

아버지께 전화를 드릴라치면 무슨 말을 해야하나 먼저 생각하고 해야해서 그 부담스러움에 자꾸만 전화하는걸 미루곤 했었는데... 이제는 그렇게라도 전화드릴 아버지가 더 이상 안계시다는 그 단절감이, 상실감이, 허전함이 문득문득 가슴에 쏴...하니 밀려와 무심히 창밖을 보게된다.

언뜻 생각지도 못한 눈물이 맺히기도 하다.

아직은..

당분간은 애도의 기간을 더 가져야할 듯 하다.

아니, 자연히 그렇게 될 듯하다.


내 존재의 뿌리인 내 아버지..

감사합니다..

사실은 아직도 아버지의 육신이 땅 속에 있다는게 믿기지 않아요..

아직은..

'단절' 그야말로 더 이상 손 잡을 수 없고 얘기 나눌 수 없는 그 단절이 잘 믿기지 않아요..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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