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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 치료 후 서울로 도망치다

몸과 마음의 경계

by 미리나



그날의 기록




두 번의 주사를 맞고 물리치료도 함께 받았으니 금방 나아질 거야.


무엇보다 원장님을 만나 마음이 놓였다.


다행히 뼈에는 큰 이상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정말 너무 아프다. 아파서 힘들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꾹 참고 버텨온 시간이 무색하게 몸은 무너지는 것 같은데 마음은 그 무너지는 걸 지켜보는 느낌이다.

단단해지고 싶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는데 그 다짐조차 자꾸 바스러져서 더 힘들다.


자꾸만 ‘그만하고 싶다’는 말이 마음속을 맴돈다.


생각과 몸이 따로국밥처럼 따로 논다.


하나로 묶어야 하는데 어디부터 다시 엮어야 할지 모르겠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기를 바라며 다시 숨을 고른다.




결국 꿀꺽 삼켜진다.


이번에도 나만 입을 닫고 나만 정신 붙잡으면 아무 일도 없던 듯 또 지나갈 것이다.


불이 났지만 연기를 들이마시며 웃는 얼굴을 연기하는 사람처럼 나는 그렇게 무너지는 법을 배워간다.


이번 일만큼은 흐트러지지 않고 마무리하고 싶다.


마지막 매듭까지 정성껏 묶고 싶다.


무너진 마음 위로 책임감을 덧씌운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언제부터 그랬는지 말을 잇기가 힘들 때면 메모를 해왔다. 그 작은 메모 한 장이 내 방패가 되어 주었다.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까?", "내가 제대로 표현했을까?"


통증으로 정신이 없으면 질문드릴 것도 깜빡하고 잊어버리거나 아픈 부위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라는 생각도 들지만 통증이 내 몸 안에서 어떻게 느껴지는지 뻣뻣한 긴장감을 언어로 옮기는 것만큼 전달하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기도 하고 최대한 정확히 설명해야 치료가 빨리 끝날 거라는 생각이다.


이번엔 전신 그림을 프린트해 아픈 부위를 체크하며 눈에 보이게 만들었다.




과연 내 통증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을까?




불안과 의문이 교차하며 마음은 다시 한번 흔들렸다.


아프다는 한 마디로 모든 감정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붙잡았다.


병원으로 가는 내내 마음은 아려왔고 죄를 지은 사람처럼 마음은 무거운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인생에 정답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해야 할 일,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한 번의 결정으로 모든 것이 명확하게 풀린다면 얼마나 마음이 편할까.


교과서처럼 명확한 해답이 있다면좋겠다 싶지만 교과서에도 정답은 없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어떻게 이 난관을 넘어야 할지 한 걸음 한 걸음이 두렵기만 했다.



2023년 9월 7일 목요일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숨이 더 가빠왔다.


잠시 숨을 고른 뒤 혈압을 체크했지만 수치는 정상이 아니었다.


그냥 일시적인 긴장이리라... 별것 아닐 거라고 애써 넘겼다.





오늘도 '넘어졌다고 둘러대야겠다.'


비장한 각오로 진료실로 걸어가 의사 선생님께 종이를 내밀었다.


그런데 하필, 휘청이며 그대로 바닥으로 넘어졌다.


아프다는 감각보다 창피함이 먼저였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귀까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의사와 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일어나기 위해 몸을 부여잡는데 그 모든 감정에 따라 온몸이 떨렸고 모든 상황이 어서 끝나기만을 바랐다.




넘어지면 이렇게 다리 전체가
멍들지 않는데?..



나를 부축해 주시며 차분히 물으셨다.


"괜찮으세요? 다리에 이렇게 힘이 없는데 일단 여기 앉으세요."


멍한 얼굴로 의자에 앉자마자,

"월요일에도 많이 힘들어 보이셨는데, 다리는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렇게 묻는 동안, 멍든 부위에 조심스레 손을 얹으셨다. 내면까지 꿰뚫어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냥 지금처럼 넘어진 거예요."


"넘어지면 이렇게 다리 전체가 멍들지 않는데?..."


고개를 갸우뚱하시며 눈썹이 한껏 올라가고 눈빛은 더욱 깊어졌다.


목젖이 한 번 오르내리고 묵묵히 날 바라보며 내 말 한마디, 몸짓 하나까지도 모두 읽어 내려는 듯한 모습으로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말씀하셨다.


"왜 그런 건지 말해봐요. 괜찮아요."


말하지 않아도 기다려 주겠다는 것은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전해졌다.


"서울은 언제 올라가세요? 올라가시기 전에 집중 치료를 하면 좋을 것 같아요."


병원에 올 때마다 치료 계획을 위해 언제까지 치료받을 수 있냐는 질문을 받았지만 이번 분위기는 달랐다.

평소에는 내 스케줄을 고려해 "3주 후예요.", "한 달 후에 가요." 했던 나는,


"내일이요."

떨면서도 무심한 듯, 침을 꼴깍 삼키며 대답했다.


나의 대답이 확실한지, 치료 의지가 분명한지 다시금 확인하시는 듯했다.

휴...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아팠던 적도 있었지만 그때는 회사 일이 바빴고 그것이 주된 이유였다.


몸이 조금이라도 느슨해지면 병가를 내도 회사의 눈치가 늘 신경 쓰여 점심시간을 반납하고 쌓아둔 연차를 쪼개며 간신히 치료를 받았다.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때로는 밤을 새워 일을 하며 버텨야 했고 그렇게 버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우리 1년에 한두 번만 보면 좋겠어요
식사는 하셨어요? 잠은 잘 주무세요?


언제나 밥과 잠을 가장 먼저 물어보신다.


이 의사 선생님께 "몇 시에 주무셨어요? 몇 시에 일어나셨어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만성 통증 환자'이자 '종합병원 환자'라는 사실이 실감 났다.


회복기에는 안 물어보셨다.


가져온 종이를 살펴보시


"표시해 둔 곳 말고 다른 곳이 불편한 곳이 있나요?

지금 가장 불편한 곳을 손으로 짚어보세요."


나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통증은 남아있지만, 첫날보다는 나아진 것 같기도 하고.."

여기도 아프고 저기도 아프고 그냥 전신이 다 아파요. 죽을 것 같아요."


"오늘은 주사를 많이 맞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많이 맞으면 좋아질 것 같아서요."


"우리 1년에 한두 번만 보면 좋겠어요.

너무 안 보면 얼굴도 까먹겠고 그렇다고 병원에 자주 오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고...



고쳐놓았더니 또 이렇게 아프면 어떡해요? 나의 긴장을 풀어주려 하시는 듯 살포시 웃으셨다.





주사 치료실에서 주사를 맞기 위해 엎드리려는데 명치가 답답해 한참을 고생했다. 천천히 하라며 도와주셨지만 나를 보는 시선이 자꾸만 느껴졌다.

다리를 유심히 살피며 무언가를 파악하려는 듯했다.


"다리는 왜 그런 거예요..."

또 물어보신다.


타이밍을 잡는 것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도 막막했다.

계속 넘어졌어요!!라고 짧게 대답했다.


환자가 숨기려는 것과, 의사가 알아내려는 것


그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주사를 많이 맞으면 빨리 나을 거라는 생각은, 결국 부질없는 환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겨우 두 번의 치료. 서둘러 나으려는 조급한 마음이 오히려 나를 더 힘들게 했다.


치료를 마치고 나니, 온몸이 뻑적지근하고 나른해졌다.


급한 불은 껐지만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고, 이유 없는 슬픔이 하염없이 밀려왔다.


고관절은 걸을 때마다 뻑뻑하게 갈리는 느낌이 들었다.


무게를 실을 때마다 뼈가 부서질 듯한 통증이 퍼져나갔다.


앉아 있다가 일어설 때면, 골반이 찢어질 듯한 저릿함이 밀려왔다.


오래 서 있으면 엉덩이뼈 깊숙한 곳이 쑤셔서 다리를 절게 되었다.


어떤 날은 통증이 둔하게 가라앉아 있다가도, 한 걸음 내디디는 순간 골반이 체중을 버티지 못할까 불안했다.



조금만 잘못 움직이면 뼈마디 사이가 틀어져 버릴 것 같은 두려움도 있었다.


고통을 계속 겪고 있다는 사실이 괴로웠고 그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조차 고통이었다.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


조금이라도 덜 아픈 것.

하지만 그 바람조차 지금의 나에겐 너무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바빠진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나는, 방향을 잃은 어린 짐승처럼 불안과 초조 속에서 서성거렸다.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듯 변화를 시도하던 나에게 그럴 때면 의사 선생님은 늘 ‘멈춤’의 의미를 일깨워 주셨다.



좋은 기억은 위로가 되어 버틸 힘을 주지만 안 좋은 기억은 희미해지는 편이 낫다. 잊혀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당분간은 억울함에 사로잡혀 놓지 못하겠지만 흘려보내는 것이 내가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제발, 나아질 수 있기를...

어떻게든 견뎌야 한다고, 이번만큼은 버텨야 한다고, 숨을 고르고 있었지만 마음은 한없이 가라앉았다.


사람들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나만 홀로 정지된 느낌이었다.




곧 내 앞에 어떤 고난이 닥칠지도 모른 채, 무거운 몸을 이끌고 서울행 열차에 올랐다.


열차는 출발하고 바퀴가 철로를 타고 거칠게 미끄러지며 쇳소리를 냈고 열차의 진동이 잔물결처럼 온몸을 타고 흘렀다.


마음속에서 '빨리 가야 한다'는 조급함이 끊임없이 뛰어다니며 몸은 따라가지 못하는데도 무작정 앞으로 가야 할 것 같은 강박에 휩싸여 있었다.



차가운 안갯속에서 발걸음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것처럼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은 채 지나간다.



창밖의 풍경이 흐려지면서 내 마음속 불안은 점점 더 뚜렷해졌다.


그 불안은 내가 나 자신을 다시 찾아가야 한다는 말을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었다.





*원장님께 치료과정에 대해 글을 쓰겠다고 하니

감사히도 허락해 주셔서 사진 및 글은 사전에 동의를 받았습니다.



원장님의 선하신 얼굴을 보면서 제 마음을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낯선 병원은 더 이상 가기가 두렵고 치료에 방해가 되어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저 꼭 살고 싶어요. 도와주시면 은혜 잊지 않을게요.


제가 말씀드릴 때까지 기다려주실 거죠? 보살핌 속에서 안전함을 느끼고 갑니다.


이곳이 얼마나 따뜻한 곳인지 알게 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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