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하는 마음

by 루체

▶슈만, 어린이 정경 Op.15, No.2 (Pf.미우라 켄지)


몇 년 전 겨울, 대연동의 한 티룸에 방문한 적이 있다. 차에 미쳐서 전국에 있는 티룸은 전부 방문할 기세로 돌아다니던 시절이었다. 이름을 잊어버린 그곳은 들어서는 순간 나의 온 마음을 사로잡았다. 창문으로 조각조각 스미는 햇살은 한없이 따뜻했고 플레이팅에서는 정성이 가득했다. 함께 나온 디저트와 차를 느릿느릿 먹으면서 분위기를 만끽했다. 티룸을 나와 지하철역으로 타박타박 내려가던 중,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동네에서 살고 싶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나가는 행인도 없고 문을 연 가게보다는 폐허에 가까운 상가가 더 많았다. 관광지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 길 한복판에서 '여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무엇에 홀렸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단지 티룸 하나 때문에? 매일매일 오고 싶은 공간은 집 바로 앞에도 있고 전포동에도 있고 서울에도 있었다. 당시 내 직장은 본가와 아주 가까운 곳이어서 딱히 이사를 올 생각이 없기도 했다. 내게 부산은 그저 놀러오는 곳에 불과했다. 휴일이 되면 부산에서 하는 공연을 보러 가고 카페에 가고 겸사겸사 자그마한 호텔에서 여유를 누리기도 했다. 거기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은 찰나의 감상에 불과했던 듯, 한동안 잊고 지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부산에 살고 있다.


나는 남쪽 어디의 조그만 동네에서 태어나 자랐다. 부산에 대한 애착이 있다고 하면 대학 시절을 보낸 탓이 크겠다. 처음으로 지하철을 타본 것도 부산, 처음으로 혼자 살아본 것도, 바깥 세상을 처음으로 경험했던 것도 부산이다. 나의 아주 많은 처음이 부산에 깃들어 있다. 처음과 현재 사이에는 몇 년의 간격이 있다. 어쩌다가 부산에 정착하기로 했느냐 하면 잘 모르겠다. 청춘의 시작점을 보낸 도시가 익숙해져서일까. 인생의 출발지를 부산으로 정한 건 그냥 본가와 너무 멀지 않으면서 인프라를 갖춘 대도시라는 이유였다. 부산에 온지 2년 남짓. 언젠가 '여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는 게 떠올랐다. 여기로 오게 될 미래를 예견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무심코 내뱉은 소망을 기어이 실현해버린 것일지도.


부산에 머물면서 나는 한 달에 몇 번씩 공연을 보러 가고 새로운 전시를 할 때마다 미술관에 가고 카페 사장님과 안면을 트고 일하던 백화점이 통째로 사라지는 걸 보았다. 아무도 없는 상영관에 혼자 앉아 영화를 보고 한겨울 시위에 나가고 기차를 타지도 않을 거면서 기차역에서 토스트를 먹기도 했다. 첫 번째로 운행하는 지하철을 타면 새벽바다를 볼 수 있었고 어느 날은 바다를 보며 엉엉 울었다. 바다에 안기고 싶었는데 바다가 밀어내서 그냥 육지에 우두커니 서 있었던 날도 있었다. 광안리에서 유명하다는 쿠키를 친구에게 선물하고 좋아하는 카페에 데려가 '이런 곳은 어떻게 찾았어'라는 말에 으쓱하기도 했다. 대학 근처의 식당에 가면 자식 대하듯 해주셨고 나는 대학생들에게 커피를 주면서 동생의 친구들을 대하듯 했다.


대부분의 경험은 어디에서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 사는 게 다 비슷비슷하니까. 바다를 면한 도시도 많다. 여수, 강릉, 거제....내게 부산이 완전히 새로운 도시도 아니다. 지하철 노선도는 외우다시피 하고 드센 사투리는 유전자 깊이 새겨져 있다. 부산이 뭐 그리 특별할 것 있나. 그냥 익숙하다고 생각하면 금세 새로운 모습을 하고 있는, 인구감소위기에 처한 대도시다. 도로는 초록불로 바뀌자마자 빵빵대고 말 짧은 아저씨들과 말이 너무 많은 아주머니들이 있다. 자기는 사투리를 안 쓰는 줄 아는데 서울에 가면 단박에 들통나는 학생들이 있고 조부모님 손에 자라 진득한 사투리를 쓰는 아이들이 있다.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을 듣고 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받고 성격이 나빠지는 날들이 있다. 해변은 여름마다 미치도록 붐비고 축제로 인한 교통 통제가 잦고 호텔에선 바가지를 씌운다. 영화 축제를 하고 남포동은 갈수록 한산하다.

정이 있어서 좋다는 말을 듣는 도시. 틱틱대면서도 모두가 나서서 도와주는 도시. 각국의 음식문화가 뒤섞인 도시. 커피 프랜차이즈의 고향. 전입신고를 해도 아이를 낳아도 손주를 길러도 청년이어도 초등학생이어도 지원금을 줘서 재정이 걱정되는 도시. 바닷바람에 맞서느라 드센 말투를 가진 도시. 그 말투로 의도치 않게 연약한(?)서울인들을 겁주는 도시. 표현을 못하고 한없이 깊은 도시. 주름지고 낡은 도시. 누군가에겐 애증이고 누군가에겐 치열한 삶의 현장이고 누군가에겐 희망이고 누군가에겐 사랑인 도시.


딱 잘라 좋은 구석은 없다. 알게 모르게 정든 것 같다. 가랑비에 옷 젖는 게 더 무섭다더니. 그냥 여기서 평생 살고싶다. 오래된 아파트를 고쳐 살고 팔리지도 않는 글을 쓰고 가끔 공연을 보러 갈 만큼만 일할 수 있으면. 달리 부산을 떠날 이유가 없다면. 꿈을 찾아 온 부산에서 현실의 행복을 찾아가고 있다. 이 낡은 도시에서 나도 같이 낡아가는 걸 낭만이라고 부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