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이 있는 서재

by 루체
나는 아무에게나 달려가 선생님! 선생님! 하고 말한다.
-정우신, 관류 실험(홍콩 정원)


선생님이라 부르고 싶었다. 내가 보았던 아름답고 철학적인 것들을 말할 수 있는 상대. 오랫동안 말을 고르고 있으면 인자하게 기다려 줄 사람. 내 편지를 받고 답신에 목소리를 담아주는 그런 사람. 나는 기차에 앉아 존경하는 선생님께, 라는 말로 편지를 시작한다. 편지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편지로 끝을 맺는다. 두 번 꺼내는 법은 없다.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 너머로 서재의 풍경이 겹쳐진다. 발소리가 나지 않는 실내화. 은은하게 흘러드는 커피향. 유리창 밖에 가득한 것은 무성한 녹음(綠陰)뿐. 비가 오면 녹음은 더욱 짙어진다. 우리는 빗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서재를 나설 때면 비가 그칠 것이다. 나는 따스한 미소를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혈연이 아닌 이에게 나의 존경을 주고 싶었다. 세상 밖으로 은퇴한 이의 안식을 나누어 받고 싶었다. 앞으로 쭉 안식년일 그에게서. 두 눈에 담긴 것은 깊은 지혜이고 경험의 바람이 머리칼을 물들였을 사람. 나는 조언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는 방황하는 청년에게 무한한 경청을 줄 것이다. 그러니 나는 그의 학생이 아니라 친구일테다.


무한한 신뢰를 줄 사람이 필요했다. 비가 억수처럼 퍼붓는 밤에 문득 찾아가도, 늑대에게 쫓기다 오두막을 발견한 나그네처럼 그리 들이닥쳐도, 아무것도 묻지 않고 따뜻한 차를 내어줄 것이다. 세상의 비극은 서재의 창을 뚫지 못한다. 나는 모든 것을 쓸어갈듯하던 악천후도 한 때의 날씨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림자가 어느 사물에나 있는 것처럼, 녹음 짙은 서재는 당연히 거기에 있을 것이다. 내가 방문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내가 필요로 하면. 언제나 열려 있고 언제나 같은 모습의 선생님이 계시는 서재.


어느 날 나는 선생님! 선생님! 하며 쨍한 목소리로 그를 부른다. 문을 열고 나온 선생님은 문고리에도 손이 닿지 않는 나를 발견한다. 내 어깨에는 빨간 책가방이 메어져 있다. 선생님은 내가 들어갈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 준다. 소파 아래로 실내화를 신은 발이 달랑거린다. 내 앞에 코코아가 담긴 하얀 머그잔이 놓인다. 나는 조약돌 같은 손으로 머그잔을 집어든다. 선생님은 놀라지 않는다. 나와 눈높이를 맞추고 앉아 과자도 먹겠느냐고 묻는다. 그러면 나는, 이따금 어른이기를 포기하고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던 나는, 길에서 넘어져 울면 누군가가 다가와 업어주기를 바랐던 나는 단박에 고개를 끄덕인다. 서재를 나서는 길에 내 손에는 사탕이 쥐여져 있다. 가방은 한없이 가볍다. 내가 감당해야 할 세상의 무게는 아무것도 없다.

시간이 멈추어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기에 서재의 시간도 흐른다. 한 권의 시집이 시간을 고이게 하더라도, 서재를 나설 때에는 약속된 시각이어야 한다. 나는 안식에 주어진 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동시에 내일이 오기를 바란다. 나의 선생님은 그제나 오늘이나 중후한 노년이었고 내일도 모레도 그럴 것이다. 내가 교복을 입었을 때에도 정장을 입었을 때에도 인생의 절반을 경험한 뒤에도 그와 비슷한 나이가 될 때에도. 그는 내가 언제까지나 선생님, 하고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하루도 나를 반기지 않은 적이 없다. 한참을 방문하지 않아도 재촉하지 않고 편지에는 만년필로 답한다. 서재를 잊고 지낸다면 너의 삶이 충만한 것이고 서재가 생각난다면 언제든 오라 한다.


풍경의 절반은 정원이다. 선생님의 서재는 눈을 감지 않아도 간단히 방문할 수 있다. 원하는 만큼의 빗소리. 드물게 피아노 음악. 필요하다면 커피향을 첨가한다.

나는 시간이 필요했다. 정원에 둘러싸인 안식처가 필요했다. 선생님이 필요했다. 아무에게나 달려가 선생님! 선생님! 하고 외치고 싶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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