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듀엣을 위한 안단테와 다섯 개의 변주 중 주제(Pf. 마르타 아르헤리치)
아주 오랜만에 러닝을 나갔다. 실은 러닝의 탈을 쓴 산책이었다. 러닝이라는 것은 비용이 제로에 가까운 운동이지만, 날씨에 심하게 제약을 받는 운동이기도 하다. 더울 때는 땀을 잔뜩 흘리는 보람이라도 있는데 추울 때는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차가운 공기가 폐를 찢어낼 듯 들어오고 충분히 데워진 몸이 뜨거운 숨을 내뱉을 수 있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기관지가 약해서 무리해서도 안 된다. 그러니 겨울에는 한없이 웅크리고 만다. 날씨를 핑계로. 실내 운동을 할 의욕조차 상실한 채로.
연일 이어진 흐린 날씨는 사람을 무기력으로 몰아갔다. 정신이 건강치 못하고 불면증도 스멀스멀 도지려 하기에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운동을 다녀왔다는 지인의 말에 영향을 받은 것도 있었다. 꾸물꾸물 옷장을 뒤져 편한 추리닝과 중간 두께의 점퍼를 걸친다. 이어폰을 꽂고 운동화 끈을 새로 묶는다. 러닝 앱을 켜고 집을 나선다.
오랫동안 웅크려 있던 몸을 갑자기 움직이는 건 좋지 않다. 다 녹아버렸을 온몸의 근육을 살살 달래서 깨워야 한다. 오늘은 산책으로 족하기로 한다. 도대체 사람의 몸뚱이는 왜 이렇게 귀찮은 것일까. 이런 자동화 시대에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유지보수 시스템이라니.
바깥은 여전히 흐리다. 길을 몇 번 건너서 공원에 들어선다. 풍경이 단번에 바뀐다. 이렇게 칙칙한 날씨에도 산책 나온 사람이 상당하다. 손을 꼭 잡고 걷는 젊은 커플, 입마개를 한 진돗개와 그의 반려, 벤치에 앉아 사람 구경을 하는 노신사, 바나나와 알배추를 양손에 들고 귀가하는 중년의 여성, 시츄와 포메라니안과 코카스패니얼, 혼자 앉아서 핸드폰을 열심히 들여다보는 아가씨, 통화를 하며 지나가는 젊은 남자, 킥보드를 타고 신난 어린이 뒤로 유아차를 끄는 부부, 운동기구를 하나씩 차지한 이들.
공원은 겨울을 지나면서 모습이 많이 바뀌어 있다. 길을 새로 닦은 것 같고 운동 공간의 위치도 바뀐 것 같다. 익숙하고 낯선 얼굴을 한 산책로를 지나면서 지난 계절을 떠올렸다. 온통 새하얀 꽃을 피워내서 지나던 이들을 전부 멈춰세웠던 나무는 아직 그 자리에 있다. 오월을 기다리는 모양이다. 배롱나무는 앙상한 가지를 산책로 쪽으로 뻗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을 장난스레 건드리기라도 할 것처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검댕을 닮은 무언가가 온통 갈색으로 떨어져 있다. 쨍한 진분홍 동백은 언제 이렇게 피었는지 모르겠고 명자나무 꽃은 빨간 점을 콕콕 그리고 있다. 까치 한 마리가 눈앞으로 위험천만하게 지나간다. 머리가 부스스한 까마귀는 사람을 겁내지도 않고 물가를 기웃거린다. 몇 번이나 목소리를 들었는데 아직도 이름을 모르는 새가 머리 위 높은 곳에서 노래를 한다.
2킬로미터 가량을 쉬지 않고 걸으니 슬슬 체온이 오르기 시작한다. 시야 언저리에 하얀 것이 어른거려서 멈춰섰다. 꽃인가 싶어 다가가니 미선나무라고 적혀 있다. 꼭 사람 이름 같다. 미선이, 하고 불러본다. 누군가의 첫사랑 느낌이 폴폴 풍긴다. 날이 흐린지라 꽃을 어떻게 찍어도 예쁘게 나오질 않는다. 그냥 포기하고 돌아서는 순간, 커다란 것이 풍경에 날아들었다.
회색 날개, 검은 꽁지머리, 주황색 부리. 의심할 여지 없는 왜가리다. 물이 있는 곳인지라 자주 볼 수 있는 녀석인데(그 녀석이 이 녀석인가는 모른다)오랜만에 보니 반갑다. 겨우내 털을 잔뜩 찌웠는지 덩치가 상당하다. 녀석은 내 키만 한 날개를 퍼득거리며 물가에 내려앉았다. 사람을 그다지 경계하지 않는 녀석이라는 건 알지만, 혹시나 놀라게 할까봐 거리를 두고 카메라를 켰다. 녀석은 휘적휘적 돌아다니나 싶더니 물을 한참 들여다 보았다. 저 자그마한 개천에 먹을 것이 있나, 하는 찰나 요만한 물고기를 한 마리 집어 올린다. 곧장 삼키지도 않고 한참을 물고만 있다. 나는 생태학습을 나온 어린애처럼 신나서 연신 셔터를 눌렀다. 몇 번이나 본 녀석임에도 볼 때마다 새롭고 좋다. 눈앞에 야생의 생명체가 있다는 게. 누구도 녀석을 건드리지 않고 어머, 왜가리네. 하며 그냥 지나가는 배려가 좋다.
산책을 하던 노부부가 녀석을 발견하고 멈춰섰다. 녀석은 코앞에 사람이 있는데도 아랑곳 않고 휘적휘적 걸어다녔다. 한참 후에야 회색 날개를 한가득 펼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어쩐지 기분이 좋아져서 공원을 한 바퀴 더 돌았다. 나도 참, 오랜만에 나온 산책에서 인간이 아닌 왜가리를 더 반가워하다니.
멀찍이 보이는 벤치에 한참 전부터 혼자 앉아 있던 이는 이제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다. 달리기 코스가 따로 마련된 공간에서 본격적으로 러닝을 하는 이들이 보인다. 나는 키 큰 잿빛 나무와 여전히 푸른 상록수를 다시 지난다. 무리하지 않고 적당히 집으로 돌아오기로 한다. 돌아오는 길에 SNS에 사진을 올렸다. 가족들에게도 보여주었다. 그쪽 동네엔 왜가리 같은 거 없지?
우편함에 꽂힌 월간지를 옆구리에 끼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아르헤리치의 모차르트를 틀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뜨끈한 떡국을 끓여 먹고, 키보드 앞에 앉았다. 그렇게 감각에 잔뜩 담아온 것들을 풀어 놓는다.
한 시간도 안 되는 짧은 산책. 뚱한 얼굴로 출발해서 밝아진 얼굴로 들어왔다. 오늘 밤은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