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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루미소 Aug 25. 2016

영원한 그들

남과 여, 2015

소리를 먹는 눈


눈이 오는 날은 사방이 조용해집니다. 누군가 그러길 원해서도 아니고, 낭만적인 기분에서 자연스레 느껴지는 고요함도 아닙니다. 실제 눈은 소리를 흡수하는 흡음력이 뛰어납니다. 방음 소재 벽에 못지 않는 성능을 갖고 있습니다. 소리를 먹는 눈…눈이 온 세상에서는 사랑하는 두 사람의 사각사각 소리만 들릴 수도 있지만,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를 먹는 것도 눈일 수 있습니다.


눈은 여러 로맨스 영화들의 배경으로 활용됐습니다. 특히 최근에 재개봉 해서 화제가 된 러브레터, 이터널선샤인에서도 눈은 중요한 소재로 나옵니다. 수북이 쌓인 눈밭은 두 팔을 벌린 채 몸을 던지는 주인공을 뒤에서 안아주기도 하고, 그들의 발자국을 따라가며 같이 슬퍼하고 기뻐하고 궁금해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겡기데스까’라는 안부인사를 그에게 전해주지 않는 것도 눈이죠.


눈 속에서 만난 남과 여

여기 또 눈 속에서도 숨죽여 얘기해야 하는 두 남녀가 있습니다. 눈이 유난히 많이 예쁘게 내린 거 같은 이번 겨울 마지막 눈 이야기가 될 듯 하군요.


두 남녀의 이름은 항상 애매모호 하게 얘기하는 버릇이 있는 남자 기홍과 똑 부러지는 여자 상민입니다. 각자의 아이들과 일 때문에 이국 땅에서 만났습니다. 눈이 많이 오는 그곳에서, 서두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속 깊은 눈이라면, 그들의 얘기를 들어줄 법도 하건만 그에도 기대지 못하는  그들이 서로에게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눈 때문에 길이 보이지 않는 숲을 함께 거닐던 그들은 완벽하게 차단된 사람 없는 집-실은 숲 속에 생뚱 맞게 서 있는 사우나-에서 상대방에 대한 투덜거림을 멈추고, 애매모호함을 접고는 유통기한(?)이 얼마나 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네가 필요하다’고 직설적으로 소통합니다.


설원은 그들을 보호해 주는 세상입니다. 그들의 마음과 얘기가 저 세상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차단해주고, 세상 밖 시선이 그들을 보지 못하게 눈부시게 빛나는 설원입니다.


하지만 설원을 벗어나면서부터 영화는 기홍과 상민을 번갈아 비추며 따로 제 갈 길을 가는 그들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왜 그들이 침묵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현실이죠. 그들 주변에는 ‘아픈’ 가족들이 있습니다. 우연히 만나 사랑할지도 모르게 된 두 사람의 마음 속에 자리하며 그들 스스로 그 마음을 왜곡하게 만드는 동인입니다. 하느님은 각자가 견딜 수 있는 고통만 준다고 하였으니, 기홍과 상민은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할 것 같은 각자의 아픈 이들을 보호하며 잘(?) 참고 살아갑니다. 어찌 보면 잔인하지만, 참을만한 여유가 있는 그들이 참아야 합니다. 힘들어도. 하지만, 그들은 더욱 견딜 만 해질 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이젠 그들도 아플 때 찾아갈 곳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찾아갈지언정 아프다고 말하진 않습니다.


‘넌 잘 살잖아’


다른 이들이 기홍과 상민에게 기특하다는 듯이, 부럽다는 듯이 하는 저 말은 어찌 보면 그들에게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부담을 지우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요. 그들의 소통이 굴절되기 시작합니다. 기홍과 상민은, 가운데 차 창문을 두고, 또는 눈과 달리 요란스레 내리는 빗 속에서, 혹은 열지 못하고 망설이는 문 앞에서 그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엇갈림을 시작합니다.


눈은 그들의 소리를 먹고, 비는 그들의 마음의 귀를 먹게 합니다.


상대가 보이는 데도 말이 전달되지 못하는 다른 방해물과 달리 ‘문’은 서로를 보지 못하게 하며 차단하는 장애물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확실한 관문이기도 합니다.


진부하거나 예상된 전개일 수도 있는 이 이야기는 관객의 마음에 어느덧 ‘그들의 미션이 성공했으면 좋겠어’라는 희망(?)을 심어주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빗나가기 시작하고, 그 위기를 넘기고, 또 어긋나려 할 때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관객이 원하는 미션입니다. 현실 속에서 그들은 잘(?) 살아야 합니다. 올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허구의 영화 안에서 관객보다 알뜰히 현실을 잘 챙기는 주인공들입니다.


애매모호함


상대방에게서 시선을 돌리는 표정으로 혹은 빈 공간을 향하는 눈빛으로 연기해야 하는 기홍과 상민을 전도연과 공유에게 맡긴 것은 다행스런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전도연의 표정은 예전보다 더 섬세해졌으며, 공유의 눈빛은 충분히 착잡했습니다.


러닝타임 내내 일관되던 그런 표정과 눈빛에 잠시 결연함이 깃들기도 했지만…그것으로 충분한 것 아니었나 싶습니다. 영화 상으로는. 하지만, 그들 앞에 길게 뻗은 숲길을 보며 ‘그들의 문’이 언젠가 열리지 않을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얘기가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너무 애매모호한가요…? ^^


눈과 숲의 나라 핀란드가 배경이었다는 것만으로도 화제가 됐었습니다. 시각적으로 크게 먹고 들어가는 영화이지만, 영화를 보시려면 마음의 귀는 열어두셔야 할겁니다.


※ 본 리뷰는 스포일링을 최소화 하고 여러분의 영화 관람 선택을 돕기 위해 작성 됐습니다.

예술적 재미 : ★★☆☆☆

예술적 표현의 과격성 : ★☆☆☆☆

상업적 재미 : ★★★☆☆

감동 : ★★★☆☆

스토리 구성 : ★★★☆☆

엔딩의 충만함 정도(허무하지 않은 정도) : ★★★★☆

허드서커 상상력 : ☆☆☆☆☆

<영화 포스터/스틸컷 출처 : 네이버 영화 ‘남과 여’ , 제작 : 영화사봄, 배급 : (주)쇼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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