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은 다 계획이 있었구나~~
"네? 그림자 역사 여행이라고요?"
"네~어머니. 그림자 역할만 해 주시면 됩니다. 꼭 그림자처럼 만요"
40대의 아줌마다. 초등 5학년의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에게 그림자 역할만 해달라니.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과연 하고 싶은 말도 많고 해야 할 말도 많은 내가 참을 수 있을 것인가?'였다.
현행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사회교과서는 한국사이다. 삼국시대부터 현대사까지.
5학년 선생님들은 2학기 개학과 동시에 쉬지 않고 달려 역사 프로젝트를 끝내시고 현장 체험 학습을 계획하셨다. 이름하여 학생 주도형 현장 체험 학습. 조금 독특한 현장체험학습이다.
하지만 5학년 정도 되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이제는 대중교통도 이용할 줄 알고 스스로 하는 것도 많아졌으니 말이다.
모둠을 나누고 목적지를 정한다. 오고 가는 교통편을 검색하고, 점심식사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목적지에서의 세부적인 이동 동선까지 모두 아이들이 계획한다. 그렇게 하루를 계획하고 마지막 도착 시간 즈음 학교로 돌아오면 끝나는 일정이다. 수업에서 크롬북을 이용하면서 지도도 살피고 경로 검색도 해가면서 아이들의 하루를 촘촘히 계획했다고 하셨다. "역사적 장소"라는 큰 주제 아래 어떤 모둠은 서대문 형무소로 향하고 또 어떤 모둠은 종묘나 근처 궁으로 향한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아이들은 치밀하다. 이동하는 버스 번호와 배차시간, 지하철 노선까지 세세하게 기록하고 혹시나 문제가 생길 때를 대비해 2안까지 준비해 두었다.
이런 아이들의 활동에 모둠별 보호자가 한 명씩 필요했다.
아무리 주도적 활동이라 하더라도 안전상 어른의 도움이 불가피했고 학부모 도우미가 그림자가 되는 것이다. 그림자라. 내 몸에 딱 붙어 있지만 독자적 행동을 할 수 없고 말도 할 수 없다. 그 말인즉 아이들이 잘못된 길로 들어설지라도 알려주어서는 안 되고 그냥 묵묵히 따라가야 한다. 한마디로 나의 생각과 뇌를 없애야 한다. 사전교육을 하면서 선생님께선 이점을 강조 또 강조하셨다. 미성년자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이야 이제는 누워서 떡 먹기다. 문제는 말을 하지 않는 것. 화장실 먼저 갔다가 갈까? 이쪽으로 가는 게 더 빠른데, 이쪽이 북쪽이지, 길을 건너야지, 여기서는 몇 번 버스 타야 해 등등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을까. 엄마의 오지랖으로 얼마나 참견하고 싶을까. 그걸 알기에 선생님께서도 신신당부를 하신 거겠지?
그림자 선생님의 하루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를 그림자로 둔 모둠은 ‘경복궁 – 점심식사 – 서대문 형무소’로 향하는 일정이다. 가정에서도 식사메뉴 정하는 것이 항상 고민이듯 아이들도 점심 식당을 정하기가 어려웠다고 했다. 조금 귀찮은 아이들은 근처 편의점 식사였고, 맛집을 검색한 아이들은 대기 시간을 고려해야 했다. 또 꼭 먹고 싶은 것이 있어서 점심 식사를 위해 버스를 타고 이동하도록 동선을 정한 모둠도 있어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상황이 생기기도 했다. 어떠한 경우든 모두 이유가 있었고 당연히 모둠 합의가 이루어졌다면 인정이었다. 하루 이만 보 걸을 생각하고 운동화에 편한 복장을 장착했다.
아이들과 함께 찾은 가을의 경복궁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아이들을 따라 뛰기도 하고 헤매기도 했지만 그 모든 것을 잊을 만큼 경복궁의 모습에 빠져든 시간이었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경복궁과 뒤로 보이는 빌딩들, 그리고 가을 단풍.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걸으며 부모님께는 할 수 없는 이야기라며 이것저것 고민 상담도 하고 5학년이니 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성에 대한 관심, 친구관계 등 아이들의 생각을 조금은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집이 아닌 야외에서 천천히 걸으며 수다 떠는 것의 즐거움을 다시 한번 맛본 시간이다.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들어 엄마에게 비밀이 많아지는 우리 딸과도 해봄직한 경험이다. 5학년에서의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6학년 졸업여행을 주도적으로 준비하는 학교인데 이렇게 예쁜 5학년들이 내년엔 또 얼마나 클지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