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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거진 미러 Apr 16. 2024

Vol.24 <열차가 출발합니다>

기록보관소

사서 문주원입니다.


바쁜 일상에 치여 살다 보면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왜 떠나고 싶어지는 걸까요?

여행은 우리를 새로운 곳으로 데려다줍니다. 여행의 방식은 저마다 다를지라도 분명 우리가 지내는 장소와는 다른 일이 일어나는 곳일 거예요 불확실성에서 오는 두려움이 있지만, 다시 돌아올 곳이 있기에 기분 좋은 떨림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아무런 계획 없이 발길이 닿는 곳으로 가보고 싶지 않나요? 혼자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즉흥적으로 떠난 기차여행을 통해 여행의 의미를 이야기하는 에세이, 

<열차가 출발합니다>와 함께 짧은 여행을 떠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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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야기는 머물던 장소를 떠날 때 비로소 시작된다. 

규칙적인 일상이 권태롭게 느껴지던 어느 저녁, 나는 떠 나기로 결심했다. 비슷한 하루가 반복되다 못해 주중과 주말의 분간 정도만 남은 날들이었다. 이제는 흐린 정신을 깨울 시간이다. 이튿날 새벽 다섯 시, 아껴두었던 옷을 꺼내 입고 매일 들고 다니는 가방에 책 한 권과 노트, 지갑, 일회용 필름 카메라를 차곡차곡 담았다. 목적지도 없이 무작정 현관문을 열었다. 

검푸른 공기가 코끝에 감도는 새벽이다. 숨결이 흰 연기로 날아가고 찬 바람이 뺨을 간질인다. 어둠이 걷힌 뒤에만 주어지는 상쾌한 공기를 천천히 누렸다. 거리에는 몇 사람들이 몸을 옹송그린 채 걸어가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 궁금했으나 이내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호기롭게 집을 나온 몇 분 전과는 달리 주춤거렸다. 나는 여행의 경험이 적었고, 특히 혼자서는 사는 도시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관성의 법칙은 사람의 생활 패턴에도 적용되는 법이다. 잠시 찬 바람 아래 있으니 광활하고 춥기까지 한 바깥에서 포근한 이부자리로 돌아가고픈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여행의 문턱에서 집을 택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영영 이곳에서만 머물게 될 것 같았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아주 짧은 여행이라도 시작해야만 했다. 이 도시를 벗어나 새로운 풍경을 보고 금방 돌아오자. 약간의 설렘과 막막함을 품에 안은 채 발걸음을 뗐다. 


외계의 존재


그렇게 도착한 곳은 서울역.


기차역은 언제나 낯선 장소였다. 기차를 타본 일도 한 손에 꼽을 만큼 적었고, 가끔 여행을 위해 방문할 때는 늘 누군가와 함께였다. 그마저도 길이 헷갈려 일행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 일쑤였다. 그러니 여기, 가방 하나만을 그러쥔 채 어색하게 서 있는 여행자는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는 중이었다. 괜스레 떨리는 마음에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역 안으로 들어섰다. 예매는커녕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무작정 이동한 탓에 매표소부터 찾았다. 아무 열차에나 올라 종점까지 가볼 작정이었다. 전광판에 띄워진 출발 예정 목록을 훑자 한 역이 눈에 들어왔다. 서울역에서 이동할 수 있는 종점 중 가장 먼 곳, 부산이었다. 성인이 되도록 한 번도 가본 적 없지만 왠지 익숙한 장소. 매표는 길게 늘어선 무인발권기가 대신하고 있었다. 화면을 몇 번 두드리자 발권이 완료됐다. 서울역 출발, 부산역 도착. 즉흥적인 기차여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발권을 마친 후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사 들고 의자에 앉았다. 약간은 얼떨떨했던 머리가 비워지자 비로소 주변 이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통창 너머로 새벽하늘이 보이고 역 내에는 많은 사람이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이른 시간이라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정반대였다. 잔잔하게 웅성거리는 말소리, 서류 가방을 들고 바삐 움직이는 구두 소리, 몸만 한 캐리어를 끌고 뛰는 여행자, 다정하게 마주 보며 이별을 아쉬워하는 연인, 몽롱한 얼굴로 아침 식사를 하는 사람들.... 승강장도 별 다를 바 없었다. 해도 채 뜨지 않은 시간에 사람들은 자신의 목적지로 바삐 이동하고 있었다. 그사이에 별다른 할 일도 계획도 목표도 없는 나. 어색한 기분에 제자리를 서성였다. 


눈을 뜨면 보이는 것


길게 뻗은 선로를 따라 열차가 들어온다. 자리에 앉자 비어있던 좌석도 하나둘 채워진다. 옆자리 승객은 가방을 올리고 이어폰을 꽂더니 금세 잠이 들었다. 평소라면 함께 눈을 감았을 테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기로 다짐했다. 기장님의 나른한 목소리가 출발을 안내하고, 이내 큰 소리에 귀가 먹먹해진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스름 한 푸른빛이 맴돌고 있다. 기차가 속도를 내자 선명하던 풍경이 뭉그러진다. 

기차가 달리기 시작하면 무의식적으로 창밖을 바라보게 된다. 균일하게 조형된 내부를 구경하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지만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풍경에 감탄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기차 창문에 비친 세상이 꿈나라 같다. 어느덧 '하늘색'이 된 하늘과 그 아래 자리한 작은 마을, 주변을 둘러싼 나무들. 아무런 슬픔도 괴로움도 없을 것만 같이 평온하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나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유달리 피곤한 날 버스를 놓치는 것만으로도 괜히 울적해지는 것처럼 세상 안에서의 나는 사소한 자극 하나에도 울고 웃는다. 하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보면 심각해 보이던 문제들도 생각보다 간단히 해결된다. 버스를 놓쳤다면 다음 버스를 타면 되는 법이니. 

우리 삶을 소설이라고 생각해보자. 작가는 물론 나 자신 이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모든 일을 '일인칭 주인공 시점' 으로 인지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이를 경험하는 나의 감정에 가장 먼저 주목하고, 두 눈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식의 직관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고통스러운 상황도 예외는 아니다. 어쩌면 더욱 빠르게 주인공의 눈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몸에서 벗어나는 순간 이야기는 새로운 시점으로 전개된다. 나의 경험을 영화처럼 혹은 기차에서 바라보는 풍경처럼 직시할 때 우리는 객관적인 시각을 확보할 수 있다. 이전까지는 비극적으로 느껴지던 사건들이 사실은 크게 심각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정말 심각하다 할지라도 사건이 해결된 후를 생각해볼 수도 있다. 모든 이야기의 절정 이후에는 결말이 있기 마련이니까. 이는 고통을 외면하는 게 아니다. 슬픔에 허우적거리는 나를 위로하는 방법 중 하나일 뿐이다. 

물론 현실은 아주 다르다는 것을 안다. '나'는 필연적으로 내 이야기의 주인공일 수밖에 없기에 삶의 굴곡을 피부로 느낀다. 그러므로 이 과정에는 꽤 큰 노력이 필요하다. 이때 기차와 같은 공간이 좋은 조력자가 된다. 기차는 물리적으로 나와 세상을 분리한다. 큰 소음은 외부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하고, 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들은 시시각각 변화하며 흩어졌다가 다시 선명해지기를 반복한다. 기차에 탄 승객들은 아무도 나를 모른다. 그 순간 나는 세상과 분리된 존재로서 객관적인 눈을 가진다. 장난감처럼 작고 평온해 보이는 세상을 바라보며 주인공에서 관찰자로 바뀌는 연습을 하는 시간이다. 이렇게 바라보니 삶의 기쁨과 고통에 일일이 연연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여행의 의미


기차는 내가 알던 세계로부터 나를 단절시킨다. 그리고 계속해서 달린다. 결국 원래 머물던 곳과는 아주 멀리 떨어진 장소로 나를 데려간다. 소설들의 도입을 생각해보면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주인공 '나'가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하면서 시작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주인공 '싱클레어'가 '데미안'이라는 새로운 인물을 만나면서 전개된다. 행로의 변경은 이야기의 시작을 가능하게 한다. 

삶도 마찬가지이다. 매번 똑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반복하는 이야기는 매력적인 플롯이 되지 못한다. 머물던 곳에서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을 만난다. 그곳이 특정 장소와 같이 물리적인 개념이든 사건이나 생각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이든 관계없이. 여행이란 이 지점에서 의의가 있다. 우리가 여행하는 이유는 나만의 이야기를 써 내리기 위함이다. 새로운 사건들을 유기적으로 엮어 하나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것. 그렇게 모인 이야기는 총체적인 삶이 된다. 

그럼에도 패턴에 매몰되기는 쉽고 도전은 어렵다. 일상적인 세계에서 걸어 나와 비일상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일은 누구에게나 두렵다. 미지의 세계에 나를 던지기 위해서는 많은 용기와 다짐이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나의 안위를 보장할 수 없고, 그렇기에 신경을 곤두세워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며 정체성을 부정당할 수도 있음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곳에 도착한 '나'는 이방인이 된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투명 인간이 되기도 한다. 이는 때때로 썩 유쾌하지 않다. 하지만 분명 가치 있다. 

김영하 작가는 저서 <여행의 이유>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행자는 낯선 존재이며, 그러므로 더 자주, 명백하게 분류되고 기호화된다. 국적, 성별, 피부색, 나이에 따른 스테레오타입이 정체성을 대체한다. 즉, 특별한 존재(some- body)가 되는 게 아니라 그저 개별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여행자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자', 노바디(nobody)일 뿐이다."

우리는 일상적인 집합 안에서 '썸바디(somebody)'로 지내왔다. 나라는 캐릭터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부모님에게, 친구에게, 지인에게 나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부탁한다면 국적, 성별, 인종, 나이 이외의 다채로운 답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여행지에서의 나는 '노바디'이다. 보이는 것만으로 설명되고 평가받는 인간. 어쩌면 눈에 띄지 않거나 너무 눈에 띄는 존재. 

우리는 '노바디'가 된 순간 몰랐던 나와 마주한다. 그리고 나의 뼈대를 더욱 명확하게 자각한다. 내가 단순히 동양인, 여성, 20대만으로 분류되는 순간에는 반발심이 생기고 나에 대해 설명하고 싶기도 하다. 이 순간 자아 정체성을 더욱 단단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온전한 객체로서 존재하면서 세상과 나를 분리하는 작업이 가능해진다. 이 또한 내가 머물던 '썸바디'의 영역을 벗어나는 순간, 즉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의자의 떨림이 잦아들 때쯤 사람들이 부스럭거리기 시작했다. 잠들었던 공기가 웅얼거리는 소리와 가방을 꾸리는 움직임으로 채워진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빛 덕에 분위기가 한층 따뜻하다. 책을 덮고 찌뿌듯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본다. 자리에서 일어나 하차를 기다리는 승객들 사이에 슬쩍 자리 잡고 섰다. 마지막으로 객실을 두리번거리며 돌아본다. 마침내 부드럽게 정차한 기차 의 문이 열렸다.

부산이다. 약 3시간가량을 달려 종점에 다다랐다. 서울역과 비슷한 듯 다른 승강장이 나를 맞이한다. 광장으로 나오자 햇볕의 온기가 머리 위로 쏟아진다. 새벽녘의 시린 공기가 어제의 일처럼 느껴진다. 여행의 설렘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내 옆을 지나 역으로 들어간다. 나 또한 미묘한 기분에 약간 들뜬다. 이제 또 어디로 가볼까. 바다, 겨울 바다를 보자. 앞으로 무슨 일이 펼쳐질지 알 수 없어도 용기 내어 새로운 시작을 마주하자. 성큼 내딛는 발걸음이 가볍다.  


Vol.24 <열차가 출발합니다> 中

Editor 이예린

Photographer 최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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