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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거진 미러 Apr 09. 2024

Vol.23 <서울, 밤>

기록보관소

사서 김시아입니다.


어둠이 내려앉아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거리를 홀로 거닐 때면 제 안의 복잡했던 생각이 차분해지곤 합니다. 엉켜 있던 마음이 조금씩 풀리고, 그 가운데 자리한 순수한 욕망을 마주하게 됩니다.


오늘은 어떤 하루를 보냈나요?

정신없이 지나가는 하루 속에서 잊은 건 없었나요?

당신의 욕망은 오늘도 안녕하신가요?


밤을 담은 사진과 조심스레 내보이는 누군가의 욕망,

포토 에세이 ‘서울, 밤'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

서울, 밤


상사가 건네는 술잔을 받아 마신다.

식당의 음식 냄새와 동료들의 술주정 소리가 뒤섞여 속이 울렁인다. 

잠시 밖으로 나와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마신다. 


벽에 기대어 목을 죄는 셔츠의 윗단추를 푼다. 

이제 좀 살 것 같아. 


북적이는 거리에는 나와 같은 사람들이 가득하다. 

똑같은 셔츠와 넥타이, 똑같은 신발. 


내일은 씻어야 하니까 30분 더 일찍 일어나야 해.

알람 설정 시간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다, 익숙한 뒷모습을 본다. 


‘그’다.

나는 취기 오른 얼굴을 매만진다. 

정말로 그가 맞다. 


그에게로 가려고 발을 내딛는 순간, 발 뒤꿈치가 찌릿해 온다. 

고개를 숙인다.

새 구두에 짓이겨진 뒤꿈치에서 피가 흐른다.

고개를 들자 그는 없다. 


멍하니 거리를 바라보다가 

다시 벽에 몸을 기댄다. 


종로, 기시감


‘새로운 곳 가볼래?’ 


그는 회사원이었다.

매일같이 멋진 옷을 입고, 좋은 차를 타고,

남부럽지 않은 회사에 다니는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한남동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을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입구에서부터 긴장이 되는 그런 곳 말이다. 


어느 날이었다. 유난히 그가 지쳐 보이던 날.

나의 손을 붙잡고 도착한 그곳에는 처음 보는 풍경이 펼쳐졌다. 

종로 거리에 빼곡히 늘어서 있는 포장마차들. 


안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을 주문처럼 외고 다니던 그는 고민이 

있다고 했다.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고. 


‘나한테는 낡아빠진 꿈 하나가 있어’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어디선가 앳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을지로, 빛나는 곳


‘나는 영화를 좋아했어’ 


어린 그는 영화를 좋아했다.

그러나 좋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영화를 공부하러 학교에 갔고, 꽤 오랜 시간에 걸쳐 졸업했다. 


그리고는 단념했다. 막연했기 때문이다.

영화를 만들어서 그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인지. 스스로 확신이 없었다. 


깊숙한 창고 속에 꿈을 넣어 놓고 모두에게 숨겼다.

마치 처음부터 꿈이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그는 빠르게 적응했다.

 매일같이 눈을 뜨면 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맸다. 


‘꿈을 꿨어’ 


회사에서 낮잠을 자다가, 깊숙한 창고로 한 걸음씩 다가갔다.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들어선 곳에는 먼지 쌓인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인쇄 골목


그는 입을 닫았다.

나는 그 안에 무엇이 있었냐고 묻지 않았다. 


함께 종각에서 만나 종로 포장마차에 들렀다 사람 

가득한 을지로를 걸었다.

그와 헤어지고 길을 걷다 고요한 골목에 들어섰다. 


인쇄 골목이었다.

반짝이던 거리와 다르게 인쇄 골목은 고요했다. 

해가 지기 전까지 살아 숨 쉬던 곳.

시끄러운 기계 소리와 일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뒤섞여 골목을 가득 채우던 곳.

한참이나 골목 위에 서서 가게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더 이상 작동하고 싶지 않는 것만 같았다. 

잠시 전원을 끄고 어릴 때의 반짝이던 빛을 찾고 

싶은 듯 하다. 


골목 건너편에는 대비되는 건물들이 있었다.

건물 안에서 그와 같은 옷차림의 사람들이 파도처럼 

휩쓸려 쏟아지듯 나왔다. 


깊숙한 창고에서 찾았던 무언가를 알 것만 같다. 


발이 불편해 고개를 숙여 바라본다. 

뒤꿈치 상처에 새살이 돋아나나 보다. 


Vol.23 <서울, 밤> 中

Editor 장서연

Photographer 이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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