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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거진 미러 Oct 08. 2024

Vol.22 <BEFORE TIME MELTS>

기록보관소


사서 박다혜입니다.

뜨거운 여름이 훌쩍 떠나가고 가을이 오고 있습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에는, 손에 묻힐 걱정 없이 아이스크림을 즐길 수 있죠.

서울 마포구에는 아이스크림뿐만 아니라 ‘시간’도 천천히 음미하자는 한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습니다.

흘러가는 시간을 또박또박 마주하며 ‘녹기 전에’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보는 건 어떨까요?


수시로 바뀌는 ‘녹전’의 메뉴에는 계절과 순간 그리고 대표의 개성이 녹아있습니다.

그 메뉴만큼이나 다채롭고 유쾌한 사장님과의 인터뷰가 담긴 <BEFORE TIME MELTS>를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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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를 저당 잡아 오지도 않은 미래를 사려 했던 적이 있다. 

여전히 내일도 내후년도 중요하지만 조금 변한 것이 있다면,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기보단 지금을 소중히 돌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행복을 유예한 채 견디던 시간 속에서 내가 놓친 것들은 무수했다. 순도 높은 웃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고마운 이들과 보내는 시간. 정말로 중요한 그런 것들 말이다. 이제는 유통기한이 다하기 전에 부유하듯 농담 같은 마음으로 살고 싶다. 적당히 무탈한 하루들이 쌓이다 보면 풍요로운 미래가 있을 터이니. 


염리동에 위치한 ‘녹기 전에’는 매일 다른 맛과 즐거움을 스쿠핑하는 아이스크림 가게이다. 시대에 휩쓸리지 않고 좋아하는 것들로 빼곡한 이 공간을 두고 박정수 대표(이하 ‘녹싸’)는 자신의 뇌를 온전히 드러낸 것이라 한다. 매력적인 사람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 있기 때문일까. 다른 가게에선 단골임을 알아보면 괜스레 도망가 던 나조차도 녹싸의 작당에 함께하고 싶다. 재료마다 녹는점이 다른 것처럼 그가 보여주는 삶의 온도도 남다르다고 느꼈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삶은 짧기에 귀히 여겨야 한다. 

비슷한 문장을 숱하게 봐왔지만 그 의미에 맞게 제대로 살아내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그러나 녹싸는 시간을 밀도 있게 즐기고자 회사를 나와 아이스크림 가게를 열었다. 그는 ‘시간도 아이스크림도 녹기 전에 소중히 여기자’고 말한다. 시간의 유한성과 현존의 아름다움을 알아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손등에 흐르는 콘 아이스크림을 허겁지겁 해치우기보단 순간을 음미하며. 찬 음식을 급하게 먹으면 눈 뒤쪽 관자놀이가 죄어 오는 통증이 느껴지지 않던가. 아무렴, 좀 녹으면 어때.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도

인스타그램 계정에서부터 화면을 뚫고 나오는 유쾌함의 힘 덕분일까. 염리동 골목을 구심점으로 재미난 사람들이 모이고 또 먼 곳의 누군가를 끌어당겨 이미 6평을 넘어선 파동을 만들었다. 아이스크림 애호가들이 뭉치고 흩어지는, 구속력은 없지만 은근한 인력을 지닌 공간이다. 

책을 읽거나 운동을 배울 필요도 없이 취향을 중심으로 생겨난 아이스크림 공동체. 주주로 불리는 이들은 채팅방에서 소통하고, 길 잃은 강아지를 찾고자 전단지를 붙이며, 매년 1월엔 가게의 겨울 방학을 대비해 아이스크림을 꽝꽝 얼린다. 아이스크림 공동체라니. 아이스크림이란 단어도 좋고 공동체라는 단어도 좋다. 두 단어가 만나면 어떤 이야기가 만들어질까? 이런 물음을 품은 사이 녹싸는 손님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상한 사람들이에요.(웃음) 저라는 사람을 보여주는 일을 했을 뿐인데 결이 맞는 분들이 좋아해 주세요. 녹전은 사람들이 저마다 지닌 익살스러운 부분을 껴안아 줄 수 있는 곳이에요. 회사도 학교도 그런 공간이 되어주지 못하지만, 여기는 괜찮으니까요. 평소에 내재된 끼를 맘껏 표현하시는게 아닐까요.” 녹전은 사람들을 끌어당김과 동시에 이들에게 삶을 지탱할 중력을 주는 듯하다. 


무한한 맛의 세계로 

소금과 감자, 바질과 와사비, 고수와 깻잎의 아이스크림화를 상상한 적 있는가. 녹싸는 아이스크림 자체를 하나의 플랫폼으로 칭했다. 그의 말마따나 익숙하면서도 낯선 재료들이 아이스크림이라는 플랫폼을 만나 무려 350여 가지의 맛으로 재탄생했다. 전례 없는 식자재의 아이스크림화가 너무나 재미있어, 기나긴 편식의 역사를 자랑하는 나까지도 생전 처음 보는 맛의 아이스크림에 도전하고 싶어진다. 생각해 보면 감자 맛도 고수 맛도 먹어본 적이 없을 뿐이었다. ‘자고로 아이스크림은 이런 맛이어야 해’. 이다지도 다양한 재료의 세상에서 일반화라니. 기대가 들어올 자리에 예상이 들어앉아 미처 누리지 못한 것이 얼마나 많을까. 녹싸가 주무르면 별반 다를 것 없어 보이는 얼음덩이도 재미난 얼굴을 하게 된다. 쇼케이스에는 통상적인 맛을 깨부수고 무한한 잠재력을 뽐내는 아이스크림이 자리하고 있었다.



취미는 저글링

녹싸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균형’이라고 한다. 빨리 질리는 성격 덕에 매일 새로운 메뉴를 선보이고, 5년에 한 번씩 직업을 바꾸고 싶다던 사람의 균형이 궁금했다. 진지함과 유머, 음과 양, 그리고 선과 악. 대립하는 낱말의 양극단을 품고 그 중심에 서고 싶다는 사람. 농담과 진담도 마찬가지라고 덧붙인다. 농담은 때로 대화에 역동성을 더하여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관계를 그르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손님 응대를 할 때도, 인터뷰할 때도 그가 뱉는 언어들은 어느 한쪽으로도 기 울지 않고 안정적이었다. 과연 능숙한 저글링 솜씨다. 그의 표현처럼 농담은 능숙한 진지함에서 기인한다. 가벼운 장난과 무거운 언어 사이에서 중용을 찾으며. 그 속에는 상대방의 공감대, 생활과 지식수준, 그리고 유머 감각을 섬세하게 헤아리는 배려가 있다. 타자와 나 사이의 거리를 살피는 마음이 녹아야 우아한 가벼움이 남듯. 


양극단을 품은 사람만이 지닌 입체감을 보았다. 깊이가 스며들고 확장마저 일궈낸 듯하다. 그를 더욱더 자기답게 만들어 주는 부분은 다름 아닌 자신의 단점이라 한다. “개인의 특성은 부족한 부분에서 나오더라고요. 단점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 캐릭터가 되기도 하고요. 그래서 요즘은 오히려 단점을 찾으려고 해요. 그 부분을 어떻게 내 무기로 만들까 고민하면서요. 저는 건망증이 심해서 지금까지의 수고를 잊기도 해요. 그게 어떻게 보면 아깝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덕분에 새로운 것을 만들고 기획하는 데 두려움이 없는 것 같아요.” 



힙보다는 딥하게 

힙보다는 딥한 매장이 되고 싶다는 ‘녹기 전에’. 광풍처럼 몰아치기보단 은은하게 기억에 남고자 한다. 그 말에는 좋아하는 것과 오래오래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묻어 있었다. 녹싸는 우리의 하루 평균 행복도가 높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오늘과 내일의 경계가 희미한 날들에서 즐거움을 전하는 사람에겐 어떤 특별함이 있는 걸까. 늘 보던 대로 보고, 늘 하던 이야기만 해서는 어제와 다른 오늘을 찾을 수 없다. 새벽 산책을 좋아하는 그는 일상에 흩어진 조각을 주워 새로운 자극을 발견하곤 한다. 차도 사람도 없는 도심 속에서 두리번거리기를 망설이지 않으며. 간판 속 활자도, 콘크리트 벽의 결도, 하늘의 모양도 유심히 톺아보는 자. 시선을 살짝만 틀어도 일상에 변주를 줄 수 있다. 매일 똑같은 출근길이라도 오늘은 정면을, 내일은 살며시 우측을. 무기력한 날에 4천 원어치의 아이스크림이 생각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흘러가는 시간을 또박또박 마주하는 대화를 마치고 가게를 나왔다. 90분 간 진담과 농담이 적절한 비율로 오갔고, 그 끝에서 나는 그의 눈을 잠시 빌릴 수 있었다. 하늘에는 구름을 찢고 나오는 햇살, 바닥에는 해가 만들 어낸 식물의 그림자. 별거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지나쳤던 모양들이 새삼스레 눈에 밟혔다. 이내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더니 초 단위로 녹아가는 아이스크림이 아른거렸다. 녹아도 맛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조마조마하던 마음이 옅어졌다. 현재를 훌쩍 뛰어넘어 미래에 살고 싶어 하던 시절은 잊어야겠다. 이제는 누구보다도 지금에 있고 싶다. 녹은 후를 걱정하지도, 녹기 전을 불안해하지도 않는. 내일, 내일, 내일 말고 오늘, 오늘, 오늘.


Editor 이승은

Photographer 박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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