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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거진 미러 Apr 13. 2022

Vol.15 <그어진 단면으로>

[기록보관소]

사서 심지윤입니다.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면 아무 일 없이 평온하게 지나갈 때도 있지만, 마음에 구멍이 나고 몸이 움츠러드는 날도 있습니다. 이런 날들의 기억이 모이다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이고 느낀 감정의 정체는 무엇인지, 남에게는 어떻게 보일지에 대한 생각이 많아지죠. 그 생각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함유진님의 포토에세이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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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늑골께가 저릿하게 아파 오면 난 잠시 숨을 멈췄다. 그러다 도저히 버틸 수 없을 땐 눈에 보이지 않는 환부를 쥐곤 잔뜩 움츠러들었다. 오랜 후에야 나는 그 증상을 명명할 수 있었다. 그건 내 입체적 인생을 무지막지하게 자르는 칼 뭉텅이가 선연히 지날 때마다 느껴지는 아픔이었다. 절취선을 끊어낸 티켓처럼 버려지고 고도의 슬픔으로 날 마구 패는. 끝내는 마땅한 기쁨도 안겨야 하는 우리네 인생의 결. 그 단면이 탄생하는 순간이라는 걸.

냉정과 집착 사이

엄마는 이런 말을 자주 했다. “넌 참 냉정하다.” 당시에는 그 말이 그렇게 속이 상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자주 울 고 절절해 할 줄 아는 성정인데, 당신 딸을 왜 그리 해석 하냔 말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처럼 무정한 인간도 없는 거다. 바닥을 치는 불우한 유년과 질곡으로 얼룩진 삶의 클라이맥스에 서 있진 않았지만, 난 항상 그 문턱에서 서성였다. 그런 이유로 소싯적의 기억들은 쓸 모 잃은 종이처럼 세절기에 몽땅 갈렸다. 얼마나 사용가치가 없었으면 내 허락도 없이 뇌가 혼자 그것들을 지워 버린 것이다. 멀건 국 위에 떠다니는 건더기마냥 수면 위 로 떠오른 몇 가지 기억 빼곤 전멸이다. 

나는 지금껏 성장해오며 어떤 이들의 어투와 하는 짓거리에 질리도록 좌절했고 어떤 현상과 일련의 시간에 비통 해했다. 그렇기에 감정적으로 피로했고 그 여파는 감정적인 무딤으로 발현됐다. 내가 불같이 화를 내고 왕창 울고 말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애석하게도 모두 오답자다. 겉으론 호들갑 떨고 세상이 내려앉은 듯 굴어도 나중에 가서는 참으로 냉랭하다. 정 없이 군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진부한 표현으로는 상처받지 않으려는 자기방어의 기제다. 결국 난 강제로 버림을 취해야만 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차츰 기억도 버리고 차차 감정도 버리는. 

그러곤 줄곧 버린 게 과다하다는 이유로 악착같이 텅 빈 곳을 채우려 했다. 관계에 집착했고 사람에 애착했다. 어찌할 수 없는 일에 눈이 빨개지도록 막 매달렸다. 다 잠든 밤, 내가 싫어진 건지 그렇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자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알 수도 없는 남의 머릿속을 유난히도 갈구했다. 그리고 난 아직 이리 산다. 고칠 수도 없더라. 유쾌하지 않은 프로세스가 돌이킬 수도 없이 체화됐다. 애절한 사실이다. ‘냉정하게 굴면서 매달린다니, 그게 바른 말이니?’ 놀랍게도 난 그리 작동하며 살아내고 있다. 다시 곰곰이 생각한다. 그래. 다들 이렇게 사는 거 아니겠냐고.

추신 없이 따뜻한 겨울

너의 우울이 지성의 부산물이었다면, 나는 네가 조금은 어리석길 바랐다. 동생에게 편지를 쓰던 고흐처럼 나는 네가 천상까지 천천히 걸어가는 테오가 되길 바랐다. 그럴 수 없었다면 너를 평생 모른 채 살아가고만 싶었다. 나는 이토록 보란 듯이 무책임한 인간으로 전시됐다. 마지막으로 널 보내주고 온 날에는 눈이 푹푹 많이도 내렸다. 두 뺨은 찬바람에 서늘했고 눈가는 홧홧했다. 사람들의 울음소리마저 흡음하는 눈은 내 그 멍청한 모습도 가려줬다. 

다시 영원의 시대로 돌아간 사람. 애달픈 새벽은 똑딱똑딱 모스부호를 보내고 나는 여기서 우리의 뜨거웠던 순간들을 시큰시큰 떠올리고 있다. 영영 볼 수 없다. 가슴에 스며들어 박히도록 쌉싸름했던 그 모든 것을. 빙하기가 온다면 나는 그것들을 꽁꽁 얼려버리고 저릿한 기억들만 계속 꺼내 보겠구나 싶다. 지구 반대편은 벌써 여름의 크리스마스를 지나 새로운 해를 맞이했다. 그곳은 무척 따뜻하다던 데. 너는 지금 어디니. 나는 나 슬프라고 만들어진 뉴스 속 유명을 달리한 사람만 마주 대하고 있다. 오래도록 묻고 싶던 것들은 켜켜이 쌓여있지만, 나는 그 외로움을 알기에 조용히 달싹이는 매무새를 감췄다. 아무도 없는 거리와 역과 강변을 기웃거렸을 얼굴. 가엾게 우는 등을 살살 쓸어줄걸. 어느 날에 모든 아이를 잃어버린 한 왕국의 소설처럼 네 이름자에는 언제고 짠맛이 묻어나겠지.

낭만적인 사랑, 황량한 벌판, 살가운 표정들. 시끄럽고 웅웅대는 목소리, 우레와 같은 박수라든가. 이국적인 향기 그리고 이름 모를 노랫말과 어떠한 음계도 나는 모조리 가방에 담고 너에게 천천히 걸어갈 거다. 언젠가 너는 나보다 어려지겠구나. 그 시간의 간극을 두고 누군가는 말하겠지. 어쩌면 너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다고. 그런데 난 그게 다 거짓깔인 걸 안다. 나는 너의 별 시답잖은 신념에도 열렬한 애정을 표했고 너를 퍽 아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 상실의 환상통에 이리도 거나하게 관여하는 사람. 원래 철 지난 슬픔이 가장 아픈 법이다. 너는 알 거야. 내가 널 얼마나 후애하는지. 이 내 솜씨 없는 사랑도 단박에 알 테지. 그리하여 널 오기로 사랑하고 있는 하루의 끝에도 눈이 내린다. 곧 돌아오는 봄은 너를 닮았겠다.

고군분투 <2:1>

내가 요 근래 경험한 가장 끔찍한 일은 눈을 또렷이 뜨고 천장을 응시한 채로 잠을 자고 있었다는 것. 심장을 쾅쾅 쳐대는,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알 수 없는. 내 안의 안온한 열돔을 깨어질 듯 두드리고 맹랑하게도 쏘아붙이는 불청객. 기저에 조용히 잠겨 내면을 눈멀게 하는 우울감도 녹 록지 않은 적인데. 나를 눈마저 뜨고 자게 할 만큼 가차 없는 불안이라는 놈도 내 일신에 막대한 피해였다. 불안감은 그 잔인함이 이를 데 없어 일상을 피폐하게 하는 데는 아주 일등 공신이다. 이리도 나를 속 앓게 하는데. 내가 감내한만큼의 반대급부가 주어지는가. 그것도 아니다. 한창 우울과 불안으로 점철될 때는 온갖 행위가 난감해진다. 누군가에게 말 한마디 하는 일이 죽기보다 두려워, 무기력과 회피라는 답가를 무한정 쏟아낸다. 주변의 그 어떤 이도 내 우울과 불안을 종식해줄 수 없음에 고달프다. 

메아리 같이 되물어오는 의문들, 현실 부정을 위해 자의 적으로 조성하는 감정 과잉상태.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나? 날 가만둘 생각은 없나?’ 그러다 보면 뚝딱 날이 밝고 난 또 일정 값이 입력된 시스템처럼 21세기의 현대인이 되어 하루를 부지한다. 

우울은 눈 내린 마당을 쓸어내고 잔 먼지를 걷어내면 보이는 판판한 땅 같아 부유물처럼 제거할 수도 없다. 불안은 또 어떤가. 생각 많고 고민으로 잠 못 드는 사람은 뇌 구조가 그리 태어난다고 한다. 그러니 이 또한 지워낼 수 없다. 걱정이 잘 발려진 유약처럼 내포된 불안들, 물먹은 솜처럼 논리를 우둔하게 만드는 우울들. 그 조악함에 나는 속수무책으로 나앉는다. 

언제부터 이들에게 공갈, 협박당하듯 살아온 걸까. 또 언제부터 플랫폼 위에서의 추락을 결심하게 된 걸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들과의 탐탁지 않은 공생. 끝끝내 그에 익숙한 인간이 되고 싶진 않았다. 죽지 못해 빌빌댈 때쯤 병원을 찾았고 약을 먹었으며 상담을 받았다. 도와달라 이야기했고 그 어떤 손이든 잡아보려 안간힘을 썼다. 요즘은 날 괴롭히는 그들을 응징하고 싶은 충동질에 휩싸인다. 항상 KO 녹다운만 당하다, 주먹을 뻗어보려 하는 중이다. 얼추 체급도 비슷해지고 있다. 이제 난 너무 잘 안다. 더 이상의 굴복은 없다는 것을.

나는 보잘것없는 기억과 감정을 동결해 외딴 계절로 유배 보냈고, 철부지 같던 나날의 무모한 친애가 잔뜩 배긴 사랑을 매듭지어야만 했다. 점멸하듯 내 하루를 아득히 쥐고 흔드는 우울과 불안에는 악다구니로 보복했다. 이게 내가 나동그라질 때마다, 운 티를 빤히 내보일 때마다 그어진 인생의 결이다. 이따금 그 결들이 사슬처럼 내 목을 졸라올 때면 벗어나려 안달했다. 그러나 시간 지나 문득 깨닫게 되더라. 인생의 결이 남긴 서러운 잔상들은 간편하게 탈부착할 순 없다는 것을. 허나 숨이 차올랐을 땐, 고고한 목걸이를 풀어내듯 떼어내 손에 쥐어도 손색없다는 것이 자명한 진실이다.



Vol.15 <그어진 단면으로> 中

Editor 함유진

Photographer 함유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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