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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거진 미러 Feb 23. 2023

Vol.17 <Re;cord 돌아가다>

[기록 보관소]

사서 오혜민입니다.


길을 걷다 우연히 들어간 가게 안에서 추억이 담긴 노래가 흘러나올 때면 잠시 과거로 돌아가 여행을 하곤 합니다. 그럴 때면 잊고 지냈던 당시의 감정과 생각이 깊은 곳에서부터 다시 피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하죠. 음악은 추억을 담고 추억은 음악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만의 특별한 음악은 무엇인가요? 신당역과 동묘앞역 사이에는 45년째 누군가의 특별함을 담은 음악들을 소중히 보관하고 있는 장소가 있습니다. 턴테이블 위 치직거리며 재생되고 있는 추억을 감상할 수 있는 곳, Vol.17 속 잠들어있는 ‘돌레코드’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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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역과 동묘앞역 사이, 청계천을 따라 쭉 걷다 보면 주의 깊게 살펴봐야 보이는 가게 하나가 있다. 서울시가 선정한 오래가게* 스티커가 붙은 출입문이 방문객을 향해 활짝 열려있다. 조심스레 내부로 들어서면 사람 두 명이 벽 쪽으로 몸을 바짝 붙여야만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통로가 나온다. 그 양 옆으로 LP와 CD가 벽면 전체에 빼곡히 늘어선 게 보인다. 시선의 끝엔 45년째 돌레코드를 운영하는 김성종 사장이 LP판을 소중히 닦고 있다. 표지가 벗겨진 오래된 LP 한 장을 아무거나 꺼내 들어 알맹이를 살펴보면, 새것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광이 나는 것은 모두 그의 정성과 애정이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입구에선 보이지 않았던 수많은 LP가 쌓여있다. 몇 장이나 될까 싶어 건넨 질문에 오늘 다 세어보고 가라는 재치 있는 대답이 돌아왔다. LP 15만 장, CD 5만 장 약 20만 장 정도로 추정되는 음반이 즐비해 있는 공간 속에서도 규칙을 찾아볼 수 있다. 아티스트 이름별로 정리해둔 음반 사이에서 ‘S’ 구역을 찾지 못해 포기하려는 찰나, LP가 빼곡히 꽂힌 선반을 밀자 그 뒤로 또 다른 음반들이 나타났다. ‘이 좁은 공간에 20만 장이나 있다고?’ 하던 의문이 해소된 순간이었다.


돌레코드의 ‘돌’은 바둑돌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김 사장의 취미인 바둑에서 시작한 가게 이름이 45년이라는 세월을 거쳐 누군가에겐 곱씹으면 향수가 느껴지는 이름이 되었다. 그와 가게 이름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순간 문득 가게에 흘러나오던 음악이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이 공간을 채우던 음악의 존재를 알아챘다. 가게 한구석에서 제 할 일을 다 한 채 멈춰있는 턴테이블은 김 사장이 카트리지를 올리자 다시 잔잔히 돌아가기 시작한다. 치직거리며 재생되는 클래식이 묘한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아날로그 방식으로 음악을 감상한다는 건 누군가에겐 귀찮은 일일 수 있겠다. 정교하고 깨끗한 음질을 버려두고 잡음이 섞여 들리는 아날로그를 구태여 고집하는 이유도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LP로 음악을 듣는 건 확실히 손이 많이 간다. 보관 시에도 판이 휘어지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며 판을 잡는 방법까지도 신경 써야 한다. 판을 잡을 때는 깨끗한 판에 지문이 묻지 않도록 중앙 라벨을 손가락으로 받쳐 재킷에서 빼낸다. 이후 판 가장자리를 손가락 안쪽으로 감싸듯 하여 턴테이블에 올려야 한다. 올리기만 한다고 곧장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수평 상태를 확인하고 적정 침압을 맞추는 등 음악 감상을 위한 최상의 조건을 모두 갖춰야 우리가 아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렇듯 LP를 통한 음악 감상은 진입 장벽이 꽤 높아 시작이 망설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준비를 마치고 바늘을 판 위에 안착시키면 재생 시간 내내 음악에만 진득하게 귀 기울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분명 디지털로 많이 들었던 익숙한 멜로디지만 공간을 꽉 채우는 음악은 또 다른 감상을 남긴다. 어떤 향수를 불러일으킬 수도, 잊고 있던 기억 속 한 장면이 스쳐 지날 수도 있다. 현존하는 레코드 가게 중 가장 오랜 세월을 자랑하는 만큼 돌레코드에는 다른 가게에선 구할 수 없는 판들도 여럿 있다. 그러나 무엇이 희귀한 판인지 몰라 LP를 고르지 못하고 있더라도 걱정하지 말라. LP의 매력은 종이 커버에도 있으니 말이다. 일단 마음에 드는 표지를 골라 아날로그의 따뜻한 소리를 돌레코드에서 먼저 청음 해보는 건 어떨까. 운명 같은 음악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연이은 폭우로 가게 내부에도 눅눅함이 자리했다. 그러나 습한 날씨보다 앞선 따스한 기운이 돌레코드에 발길을 머무르게 했다. 때마침 비가 오지 않아 문밖에서 들려오는 매미 소리를 배경으로 음반들 사이를 횡단했다. 인터넷을 조금 뒤지면 중고로 구할 수 있는 LP들도 많지만, 과거의 흔적이 덕지덕지 묻은 LP 커버를 손끝으로 훑는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에디터가 스치듯 지나친 음반은 그 시절 누군가의 잠 못 드는 밤을 함께한 노래였을 테다. 돌레코드보다도 어린 날을 살아온 에디터는 알음알음 익숙한 제목의 음반을 찾아보았다. 이문세 4집이라든지 스티비 원더 20집, 들국화 1집 등 알고 있는 음반을 발견했을 땐 마치 보물이라도 찾은 양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번졌다.바닥에 쌓인 LP를 뒤적이고 있을 때 교복을 입은 학생 한 명이 가게로 들어섰다. 무리 지어 하교하는 여느 또래들과 달리 조그만 가게로 향해 온 그는 사뭇 진지한 눈빛으로 LP 하나를 꺼내 들었다. 중장년층 손님이 대부분일 것이라는 예상과 다르게 돌레코드엔 다양한 연령대의 손님이 오갔다. 그들은 음반을 사지 않더라도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한 표정으로 가게에 흘러나오는 음악을 감상하고 가기도 했다. 어쩌면 이 공간을 채우고 있는 건 음반이 아닌 저마다의 순간을 잊지 않고 찾아오는 수많은 이들의 마음이 아닐까.



Vol. 17 <Re;cord 돌아가다> 中

Editor 조아현

Photographer 장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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