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피에타를 보고, 조각 피에타를 보러 가기까지
내가 미켈란젤로의 조각 피에타를 실제로 보고 싶다 생각한 것은 영화 피에타 때문이었다. 나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본 적이 없었다. 영화를 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김기덕 감독 영화 전반에 흐르는 특유의 불쾌하고 불편한 감정을 굳이 느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심 호기심도 있었지만 찾아보지는 않던 와중에, 영화 피에타를 보고 감상문을 제출해야 하는 대학교 교양수업 과제가 생겼다. 베니스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작품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처음으로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보게 되었다.
주인공 강도는 끔찍한 방법으로 채무자들의 돈을 뜯어내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가족 하나 없이 자라온 그의 앞에 어느 날 본인이 엄마라고 주장하는 미선이 불쑥 나타난다. 강도는 미선의 정체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을 품으며 혼란을 겪지만, 서서히 마음을 연다. 아무것도 잃을 게 없던 강도는 미선을 진짜 엄마로 받아들이고 엄마의 존재를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미선은 누군가에게 위협받는 척 자작극을 벌이며 강도의 눈앞에서 떨어져 죽는다. 사실 미선은 강도에 의해 자식을 잃은 엄마로, 복수를 하기 위해 강도를 찾은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강도 또한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걸로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미선이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면서도, 강도도 불쌍하다고 여기던 것이었다. 복수를 했는데 왜 이렇게 슬픈지 모르겠다던 미선이 아렸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복수는 복수조차 사랑이어서 그 속에 묘하게 천국이 있었다. '상처 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는 칼 구스타브 융의 유명한 말처럼, 아들을 처절하게 잃은 상처를 가진 미선이 버림받은 아들인 강도를 구원한 것이다. 강도는 복수조차 사랑인 미선의 복수를 통해 구원받았다. 진짜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미선은 강도에게 여전히 엄마였다. 엄마가 원하는 것이 죽음이라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것이다. 강도는 죽음으로써 새롭게 태어났다. 동양적인 문화에서 보는 서양의 구원을 보여주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에타는 여전히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김기덕 감독의 영화다. 이 영화 역시 불쾌하고 불편하지만, 그 안에서도 계속 이야기를 끌어내는 김기덕 감독의 특성과 문법을 그대로 따라간다. 마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속에서 성장한 것 같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보며, 나는 언젠가 피에타 조각상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로마에 온 것이다.
일련의 해프닝들로 인해 로마까지 가는 여정은 순탄치 않았고, 그 여파로 나는 피에타를 보러 가기 하루 전날 밤을 꼬박 새우게 되었다. 그래도 나는 결국 집념으로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에 있는 피에타 조각상 앞에 섰다. 아들을 잃은 성모 마리아는 웃지도 울지도 않는 표정으로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안고 있었다. 세월도 비껴간 얼굴은 너무 아름다웠다. 미화됐다거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목숨 같은 아들이 참담하게 죽었다.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엄마는 완전히 슬픔과 하나가 돼서 나도 잊어버리고 슬픔도 잊어버렸다. 아무것도 삶에 끼어들 게 없이 황폐해진 채, 비탄으로 세상을 품은 마리아가 보였다. 대리석을 깎아 조각했다고는 믿기지 않는 섬세하고 정교한 조각 앞에서 나는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고 오래 바라보았다.
피에타가 공개되었을 때, 예수가 성모 마리아 대비 너무 작아 보인다는 비판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각상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예수가 더 커 보인다. 이 조각상은 하늘에서 지켜보는 하느님을 위한 작품이지, 정면에서 보는 인간을 위한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피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같은 인간인 엄마 마리아의 슬픔만이 보일 뿐이라는 바티칸 투어 가이드님의 설명이 기억에 남는다. 르네상스 조각의 레전드 피에타와 천재 조각가 미켈란젤로를 만났던 로마를 나는 영영 잊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