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를 처음 시작하는 분들을 위한 A to Z
나는 다양한 방식으로 독서노트를 쓰고 있다. 교과서 요점 정리를 하듯 표와 그래프로 정리하기도 하고, 인물 관계도나 타임라인을 그려가면서 줄거리를 정리하기도 한다. 일기 형식으로 독후감을 쓸 때도 있다. 그러나 대개는 문장을 베껴쓰는 필사를 주로 한다.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독서노트에 필사를 할 때는 다음의 세 가지를 고려한다. 첫째 베껴 쓸 책과 필사방법, 두번째 필사노트와 펜, 그리고 마지막으로 필사 환경. 두번째는 이미 얘기했으니 첫번째와 세번째에 대해 얘기해보겠다.
생각해보니 필사가 무엇인지 모르는 분도 있을 것 같다. 필사란 책의 문장을 손으로 옮겨적는 행위를 말한다. 그런 걸 쓸데없이 왜 하냐...고 의문을 갖는 분도 있을 것이다. 이유는 다양하다. 글을 잘 쓰는 작가의 문장력을 배우기 위해서, 작가를 향한 팬심 때문에, 내 마음에 와 닿는 문장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손으로 글씨를 쓰는 일이 재미있어서, 홀로 오롯이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쓰는 기분이 좋아서,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에서 벗어나 아날로그의 감각을 느끼고 싶어서, 하루에 30분 정도는 쓸데없는 일도 해보고 싶어서, 모두가 각자의 이유로 필사를 즐기고 있다.
처음 필사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경우 어떤 책을 읽고 베껴쓰기를 해야 할 지 막막할 수 있다. 그럴 때는 눈에 보이는 아무 책이나 집어들기를 권유한다. 신기하게도 책이 없는 집은 없다. 서점에서 책을 사 본 일이 없는데도 책은 마치 집안의 벽지처럼 장판처럼 어딘가에 자연스럽게 배치돼 있다. 어디선가 받아온 팜플렛, 요리 레시피 책, <좋은 생각>같은 얇은 잡지나 신문, 365일 명언집처럼 언제 집에 가져왔는지 기억에 없는 다양한 형태의 책들이 집집마다 존재한다.
사 놓고 읽지 않은 책은 또 얼마나 많은가. 아무리 재미없다고 느껴졌던 책도 일단 읽으면서 필사를 해 보면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게 된다. 한번도 관심 두지 않았던 책의 문장을 필사하는 동안 '이 책이 이렇게나 좋았어?' 하고 놀라게 될 것이다. 한 권의 책이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걸 감안하면 세상에 무가치한 책은 한 권도 없다. 아무거나 랜덤으로 집어들어도 일단 쓰다보면 누군가의 삶이, 가치가, 아름다움이 내 안으로 천천히 스며들게 된다.
아무 책이나 선택하는 것조차 버거운 이들이라면 일단 현재 자신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살펴보면 도움이 된다. 내 경우에는 올해 4월, 온라인 글쓰기 코칭을 시작하기 위해 작법과 관련된 책을 탐독했고 1인 콘텐츠 크리에이터로서 돈을 벌기 위해 창업 자기계발서를 읽으면서 필사를 했다. 독서가 아직 부담스러운 이들이라면 독서법과 관련된 자기계발서나 인문학 서적을 선택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독서로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킨 이들의 '책 간증' 이야기를 필사하다보면 엄청난 동기 부여가 돼서 빨리 다음 책을 읽고 싶어질 것이다. 부자가 되기를 꿈꾼다면 금융과 투자와 관련된 책을, 작가를 꿈꾼다면 국내외 대문호들의 고전 작품을, 마음의 안정과 위로가 필요하다면 심리학 서적을, 좋은 습관을 만드는 데 관심이 있다면 습관과 관련한 책을 택해 필사를 시작해볼 수 있다. 어떤 책을 선택하든 자신의 삶과 연관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목적의식을 가지고 꾸준히 필사를 해 나갈 수 있다. 독서와 필사에 어느정도 익숙해지고 나면 필사의 순수한 즐거움을 넘어 신성함마저 느끼게 될 것이다. 이동진 영화 평론가는 필사의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심한 사춘기를 겪느라 기나긴 겨울밤, 세상으로부터 숨어든 채 골방에서만 보내던 그때, 저는 <무진기행>을 직접 노트에 베껴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김승옥 작가가 구사하고 있는 문장 작법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 소설이 너무 좋아서 직접 내 손으로 볼펜을 들고 문장 하나하나를 옮겨 적고 싶어서였지요. <밤은 책이다_이동진>
이처럼 '너무 좋다'라는 말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을 만큼 좋은 책을 만나면 내 손으로 책 속의 글을 옮겨 적고 싶어진다. 책 한 권을 내 몸에 새긴다는 듯한 기분을 만끽하며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영혼과 더 깊게 소통하는 느낌이들기 때문이다. <무진기행>은 필사용 판본으로도 출간됐다.
필사는 이동진 영화평론가처럼 책 한 권 전체를 필사하기도 하고 또는 인상깊은 문장만 골라서 필사를 하기도 한다. 두 가지 다 좋은 방법이니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고르면 된다. 내 경우는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와 닿는 문장을 밑줄 쳐 두었다가 책을 읽으면서 필사를 하기도 하고, 책을 다 읽고난 후에 필사를 하기도 한다. 조만간 책 한 권 전체를 필사하는 일에도 도전해보고 싶지만, 책 한 권만 붙잡고 있기에는 읽고 싶은 책이, 옮겨 적고 싶은 문장이 많다. 아직까지는 하루 한 문장을 적더라도 내 것으로 소화하는 데에 더 집중하고 싶다.
베껴써야 할 책과 필사 방법, 필사 장비에 관한 고민은 쉽게 떠올릴 수 있지만 세번째, 필사 환경은 의외로 간과하기 쉽다. 노트를 작성하기 전 나는 항상 손걸레로 책상 또는 테이블 위의 먼지를 깨끗하게 닦는다. (그 행위는 가끔 대청소로 이어지기도 한다) 필사가 매일의 정화 의식, 리츄얼(ritual)이 된 내게는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테이블을 닦는 마음이 곧 필사를 하는 마음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깨끗하게 정리된 테이블 위에는 작은 화분이나 화사한 꽃을 가져다 놓는 것도 좋다. 싱싱한 생명을 옆에 두는 것만으로도 마음가짐이 확 달라진다. 필사를 할 때 나는 항상 블랙티나 카모마일 티를 끓이거나, 커피를 내린다. 따듯한 음료로 몸을 데우는 일은 일종의 필사 준비운동이랄 수 있다. 찻잔이나 머그컵에 관심이 없다면 이 참에 '필사용'으로 하나 구입하기를 추천한다. 물건에 대한 과한 집착은 독이지만 적당한 애착은 일상을 풍요롭게 한다.
향이나 초를 피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늦은 밤 형광등 대신 스탠드를 밝게 켜놓고 환기가 잘 되도록 창문을 살짝 연 채 소이 캔들이나 샌달우드 향을 피우면 정말로 신성한 느낌이 든다. 샌달우드 특유의 절 냄새가 너무 강해서 부담스럽다면 플로랄 계열의 가볍고 은은한 향을 추천한다. 필사를 하는 도중 향과 초가 타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진다.
마지막으로 필사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스트레칭이다. 필사를 하면 할수록, 나는 이것이 스포츠에 가깝다는 생각을 한다. 어찌됐든 몸으로 하는 행위인지라, 근력과 지구력을 요하기 때문이다. 필사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앉아서 20-30분 정도만 해도 다음날 근육이 뭉치고 온 몸이 쑤신다. 앉아서 쓰다보면 고개가 자연 비뚤어지고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가므로 목이 잘 돌아가는 경우도 생긴다. 갑자기 운동을 하고 난 다음날과 비슷한 몸의 현상을 겪게 되는 것이다. 엎드려서 쓸 경우, 필사를 할 때는 편할 수 있지만 두통을 유발할 수 있다. 최대한 바른 자세로 앉아서 필사를 하고 20,30분에 한번씩은 일어나 가볍게 전신 스트레칭을 해 준다. 그것이 '롱런'의 필사를 할 수 있는 노하우다. 필사도 처음 시작할 때는 가벼운 마음으로 조금씩 천천히 하면서 늘려나가는 것이 좋다. 무리하다가는 금방 질리거나 지칠 수 있기 때문이다.
건강에 좋은 음식의 효능이나 운동의 효과를 아무리 설명해줘도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영원히 알 수 없듯이 필사도 마찬가지다. 집에 책이 한 권이라도 있다면 당장 시작해보기를 바란다! (한 권도 없는 집도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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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료의 필사 추천 도서 목록
: 주관적인 견해입니다. 자신에게 맞는 신발을 신고 달려야 하듯이 책도 자신에게 맞는 책을 고르길 추천해요 :)
<자기계발서>
1. 타이탄의 도구들
2. 미라클 모닝
3. 실행이 답이다
4. 마스터리의 법칙
5. 나는 퇴근 후 사장이 된다
<소설>
1. 박완서, 박경리, 오정희 작가의 모든 소설
2. 당분간 인간_ 서유미
3. 아직 멀었다는 말_ 권여선
4. 국내 문학상 단편집
5. 무진기행_김승옥
<인문학>
1. 생명이 자본이다_이어령
2. 사람, 환대, 장소_ 김현경
3.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_기시마사히코
4.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_정희진
5.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_황현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