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이유 없이 종교에 끌렸다. 십자가만 보면 마음이 신성해지고 절에 가서 향냄새를 맡으면 심신이 안정되었다. 사는 게 힘들어 뒤늦게 불교에 정착한 엄마의 영향이 아니었다면 사이비 종교에 빠졌을지도 몰랐다. 5만원만 내면 조상들 제사를 지내준다는 말에 깜빡 속아 주머니 털리던 순진한 시절도 있었다. 이후 대학시절 만난 부처님 세계는 다행히도 나처럼 돈 없는 사람, 아니 돈이 없는 사람일수록 두 팔 벌려 환영해주었다. 졸업 학기를 앞두고 심란한 마음 달래기 위해, 꼴보기 싫은 직장상사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절에서 무전취식 하며 일주일, 한 달씩 수행하기도 했고, 다음 생에는 스님이 되면 어떨까 상상해보기도 했다. 기혼자로 살고 있는 지금도 '아직 늦지 않았어' 하며 출가자로서의 미래를 꿈꿔보기도 하는데, 두고 떠나기엔 하도 귀여운 남편을 만나서 이번 생은 재가자로 살다 마감하지 싶다. '조'와 '울'을 반복하고 '하기 싫은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갈등하며 감정 기복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현생에서는 삶을 무사히 완주하는 데 의의를 두며 살려고 한다.
작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다른 일정은 줄이고 절에 들어가 지냈다. 타향 살이하며 얻은 마음의 때를 벗기기 위해서 였다. 절에서는 매일 세 번 예불을 드린다. 예불 의식에 포함된 ‘칠정례’ 는 말 그대로 7번 이마를 땅에 대고 불(부처님), 법(부처님의 가르침), 승(가르침을 전하는 스승)에 절을 하는 예법이다. 절을 할 때마다 ‘지심귀명례’ 하고 소리 내어 외는데, 이를 풀이하면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목숨 바쳐 귀의하고 예배드린다’ 는 뜻이다. 낮은 목소리로 ‘지심귀명례’ 하면 가슴이 뜨거워지다가도 ‘목숨까지 바칠 생각은 아직 없는데....’ 하는 마음도 든다. 그 정도로 진실한 마음을 내라는 이야기인 줄은 알겠지만 혹시라도 은유가 아니라 직유법일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예불할 때조차 알량한 속세 계산기를 굴리는 주제에 스님이 되고 싶다고 하다니 뻔뻔하다. 그래도 나는 예불 시간을 좋아한다. 세 번의 예불 중에서도 새벽 예불 시간에 마음이 가장 신성해진다. 새벽 3시 반에 예불에 참석하려면 2시 50분쯤 일어나 반듯하게 이불을 개고 세수를 하고 옷 매무새를 정돈하고......는 거짓말이고 3시 25분 쯤 일어나 후다닥 법당으로 올라가서 급하게 눈곱을 떼고 머리를 단정히 묶는다. 아직 목숨 바쳐 예배할 정도는 아닌 것이다. 죽비 소리에 맞춰 108배를 하다보면 어느덧 잠이 확 달아나 해탈의 경지에 오를....리는 없고 대부분 ‘힘들다, 이거 왜 해야지, 하기 싫다’ 번뇌 망상이 들끓는다. 처음 108배를 하던 10년 전보다 좀 나아진 게 있다면 이제는 하기 싫다는 마음을 이기려는 시도를 내려놓고, 하기 싫다는 마음이 어디에서부터 오는지 관찰한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면 내 인생이 '하기 싫은 감정'으로 가득하다는 걸 문득 깨닫는다. 학교 가기 싫다, 학원 가기 싫다, 숙제하기 싫다, 시험 보기 싫다, 회사 가기 싫다, 꼴 보기 싫다, 운동하기 싫다, 샤워하기 싫다, 밥 먹기 싫다, 일어나기 싫다, 열심히 살기 싫다, 한국이 싫다, 이 세상이 싫다, 살기 싫다.. 숱하게 일어난 이 '싫은 마음'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걸까. 다음 생에선 알게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앞서 고백했듯 10년 째 108배 중이지만 여전히 하기 싫은 일이다. 하기 싫은데도 매일 하려는 까닭은 두 가지다. 절이라도 안 하면 내 자신이 너무 쓰레기 같아서이고, 두번째로는 하기 싫은 마음은 잠깐이지만 하고 난 후의 기분 좋은 상태는 그보다 오래오래 지속되기 때문이다. 108배를 해야 할 시간이 다가올 때마다 내 마음은 초조해지고 평소보다 더 게을러지는데 그럴 때마다 '딱 1배만 하자'고 나를 구슬린다. 어릴 때 내가 하도 밥을 잘 안 먹어서 엄마가 써 먹던 수법과 비슷하다. '딱 한 숟가락만 먹자' 하면서 간신히 나를 밥상 앞에 앉혀 놓고 꾸역꾸역 밥 한 그릇을 비우게 했던 엄마를 떠올리며, 나에게 딱 1배만 하도록 시킨다. 시작이 반이라고, 1배 하면 108배를 다 한 거나 다름없다. 단 1번의 절도 하지 않은 날은 있었지만, 1번만 한 날은 없었다. 일단 시작을 하면 끝을 보게 되어 있다.
하기 싫은 일을 할 때는 나를 살살 달래 가며 해야 하는데, 이때 하지 않았을 때의 기분과 하고 난 후의 기분을 상상하면 도움이 된다. 우선 상황 1, 하기로 한 일을 하지 않았을 때를 보자. 퇴근 후 나의 이성은 잘못된 자세와 식습관으로 고통 받는 몸뚱이를 위해 헬스장에, 요가센터에 가자고 설득한다. 그러나 나의 직관은 집에 가서 예능을 보면서 치맥을 즐겨야 한다고 유혹한다. 오늘 하루 치열하게 버틴 나를 위한 보상이 있어야 내일도 열심히 살 수 있다는 합리화를 거쳐 집으로 돌아가 배부르게 야식을 즐긴다. 그리고는 유튜브에 접속해 두 시간 동안 무한도전 지난 에피소드를 보고 어쩐지 속이 허전해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하루치의 스트레스는 풀었으나 자려고 누우니 어쩐지 찝찝하다. 인생을 낭비한 것이 죄라는데... 그렇다면 나는 염라대왕에게 무기 징역을 선고 받게 될까. 인생만 낭비한 게 아니라 새해 큰 맘 먹고 끊은 40만원 짜리 헬스장 연간 회원권도 낭비하고 있다. 올해도 반이 지나고 있고 규칙적으로 운동하겠다는 새해 목표는 흐지부지 되어간다. '나는 이래서 안 되..' 자기 비하에서 오는 무력감과 콜레스테롤 수치는 점점 높아지는데 반해 체력과 의욕은 바닥을 찍었다.
반대로 상황 2, 운동하기 싫어하는 마음의 멱살을 잡고 헬스장으로 간 경우를 상상해 본다. 가기 싫었는데 막상 운동하고 있는 인류 동지들을 보니 새삼 동기부여가 샘솟는다. 이를 악물고 얼굴이 못생겨지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스쿼트 100개, 러닝머신 30분을 마친다. 퇴근 후 땀 흘리는 나, 성공한 도시인의 기분에 도취되고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 거울을 보니 비에 젖은 포대자루처럼 거무죽죽했던 혈색이 환해진다. 남들 눈치 좀 보다가 거울 샷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체력은 국력!‘ (미안하다, 옛날 사람이다) 흠뻑 땀 흘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다. 인생을 낭비한 것이 죄라면... 나는 무죄! 하기 싫은 일을 해냈다는 성취감, 땀 흘린 후의 상쾌함, 체력도 정신력도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는 생각에 도파민과 세로토닌 호르몬이 흘러 넘친다. 내 일상에도 전에 없던 활력과 에너지가 가득찬다. 자, 나는 상황 1, 2 중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것도 없이 어쩌면 상황 2를 체험한 뒤 집에 가서 상황 1을 보상으로 줄 수도 있지 않을까. (경험 상, 상황 1 체험 후 상황 2로 가는 일은 극히 드물다)
‘하기 싫은 마음을 이기고 할 때 성장한다’는 깨달음은 책 속 이론이 아닌 현실의 경험을 통해 얻어야 한다. 단 한 번의 성취감이 우리의 평생을 좌우할 수도 있다. 하기 싫은 마음을 이기고 100일 동안 한 무언가가 있는가? 없다면 지금 당장 찾아서 해보길 바란다. 하기 싫은 일이라면 무엇이든 좋다. 아니, 하기 싫을 수록 좋다. 화장실 변기 닦기, 이불개기, 신발 정리하기처럼 간단한 일이지만 매일 하기엔 은근히 귀찮은 일, 조깅, 명상, 요가, 일기쓰기처럼 하면 좋다는 걸 알지만 시작하기까지 어려움이 있는 일, 혹은 미워하는 사람을 칭찬하는 일기를 쓰거나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싶은 회사를 3년까지는 다녀보는 극한의 일까지, 하기 싫은 일은 도처에 널려있다. (야호!) 그것만 제대로 해내면 사는 일이 다소 쉬워질 수 있다면 한번쯤 감내해볼 만하지 않은가. '하기 싫은 마음'은 내가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신호다.
돌아보면 나는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았다. 보기 싫은 사람은 안 보면 그만이었고, 하기 싫은 일은 때려치우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어느 순간 인격적으로나 커리어 면에서나 정체된 내 자신을 발견했다. 싫은 사람, 싫은 회사를 참으면서 버티고 견디는 사람들이 신기했다. 생각해보면 그들의 인내심이 대단한 것도 있지만, 내 안에 인내심이라곤 하나도 없는 거였다. 싫은 마음의 동력인 저항심을 극복하고 나도 뭔가 꾸준히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싫은 마음과 화해하면 좋은 마음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았고 그게 부처님의 가르침인 해탈일지 몰랐다. 가만히 누워서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해지길 원하는 건 요행을 바라는 일이었다. 뭐라도 해야했다. 그래서 108배를 했다.
치킨은 한 입 먹을 때만 맛있고, 술은 마실 땐 기분 좋지만 다음날엔 속 쓰리고, 자위도 막상 하고 나면 허무하기 이를 데 없다. 반면 108배는 할 때는 힘이 들지만 하고 나면 잔잔한 마음의 평화를 오래오래 누릴 수 있다.
무엇보다 돈이 들지 않는다.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위해 우리는 그동안 얼마만큼의 돈을 써 버렸나. 퀭한 눈으로 밤새 인터넷 쇼핑을 하고 택배 받을 때 잠깐 행복했다가 쇼핑한 물건이 지겨워질 때 쯤 또 새로운 물건을 산다. 1주일 전 바꾼 헤어스타일을 또 바꾸고 밤 12시에 야식을 시켜먹으며 엥겔지수 향상에 적극 나선다. 야식으로 얻은 지방을 빼기 위해 거금 들여 PT를 받고, 다이어트 효과가 있다는 영하 130도의 냉각 사우나에서 3분을 오돌오돌 떨기도 하며, 멀쩡한 집 놔두고 옆 동네 5성급 호텔에 가서 밥을 먹고 잠을 잔다. 반면 108배는 허상에 불과했던 나의 소비욕을 잠재웠고 외모에 대한 강박관념을 내려놓게 했으며 15분의 시간을 투자해 단단한 허벅지와 복근을 갖게 했다. 여기에 더해 불면증이라고는 모르는 인생을 살게 해 줬다. 공짜로 말이다. 가성비를 따지자는 게 아니다. 다만, 본능대로 마음가는대로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고 남은 인생을 그 뒷감당을 하는 데허비할 것인가, 하기 싫은 일이지만 꼭 필요한 일을 해내고 남은 인생을 맘 편하게, 행복하게 살 것인가를 한번쯤 생각해보고 싶었다.
오늘도 나는 ‘하기 싫다’ ‘귀찮다’는 마음으로 간신히 좌복 앞에 서서 절을 한다. 하고 난 후의 기분, 내일의 기분, 남은 인생의 기분을 생각하면서 108번의 절을 마쳤다. 인내심 레벨 제로.. 아니 마이너스 였던 나도 했다. -인내심 레벨 제로는 요즘 찍었다. 앞으로 플러스가 될 일만 남았다. - 여러분도 할 수 있다. 지금 당장, 하기 싫은 일부터 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