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그렇게 자신이 없나?!

by 미생팀장

[작가의 말]


앞서 1-4화에서는 2023년, 10년차 팀장인 내가 평가라는 칼날을 쥐고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드렸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오기까지는 17년의 여정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 시작점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2006년, 나는 컨설팅펌의 '을'이었습니다.




프롤로그: "그렇게 자신이 없나?!"


2006년, 여의도 오피스

컨설팅펌 사무실의 시계는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금요일 오후 5시에 클라이언트가 던진 한마디.


"월요일 아침까지 제안서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주말이 날아갔다. 토요일 아침부터 일요일 밤까지. 사무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월요일 새벽 3시. 마침내 제안서가 완성되었다.

동료들은 이미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나는 컴퓨터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게 내가 원했던 삶인가?'

'을'의 삶은 처절했다.


평일에도 밤 10시면 일찍 퇴근하는 것이었다. 그보다 일찍 나가려면 주위 눈치를 봐야 했다. 야근을 한다면? 새벽 2~3시는 기본이었다.

그날 새벽, 나는 다짐했다.


'다시는 을은 하지 않으리라.'




2007년 초, 스위스 엘리베이터 회사


면접을 보러 갔다.

HR Director는 삼성SDC 출신이라고 했다. 이후 알카텔, 컴팩 등 외국계 회사의 Director를 거쳐온 분이었다.


"류 00님, 우리 회사에서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일과 삶의 균형을 찾고 싶습니다. 그러면 회사에도 더 큰 성과로 기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우리는 그런 회사입니다."


합격 통보를 받았다.

'갑'이 되는 것이었다. 떨렸다.


입사 후 두 달이 지났다. 일은 정시에 끝났다. 주말은 온전히 내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불안했다.

일이 끝나도 Director의 눈치를 봤다. 먼저 일어서지 못했다.


'내가 너무 일찍 가는 건 아닐까?'

'게을러 보이는 건 아닐까?'


컨설팅펌 시절의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어느 날 저녁, 팀 회식이 있었다. Director가 맥주를 따라주며 말했다.


"류 과장, 요즘 어때요?"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근데 왜 자꾸 눈치를 봐요?"

"…네?"


Director가 정색을 했다.


"그렇게 자신이 없나?!"


순간 얼어붙었다.


"일 끝났으면 일찍일찍 들어가요. 자리를 지키는 게 아니라, 결과를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오는 길. 나는 그 말을 곱씹었다.


'그렇게 자신이 없나?'


부끄러웠다. '을'의 습관이 이렇게 깊이 박혀 있었다는 것이.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기분이었다.


'성과로 평가받는 세상.'

'일과 삶이 균형 잡힌 세상.'


나는 그때 생각했다.


'이런 삶도 가능하구나.'




2007년 가을, 예상치 못한 전화

스위스 회사 입사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나는 '갑'의 편안함과 Work & Life Balance를 만끽하고 있었다. 6시면 퇴근했고, 주말은 온전히 내 시간이었다.

그때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000 부사장입니다."

"…네?"

"예전에 Wharton School 프로그램에 참가하셨던 000 대표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컨설팅펌 시절, Wharton의 Executive Education 프로그램을 운영했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경영대학원. 세계적인 명문이었다.


"그때 하셨던 모델의 교육 사업을 저희가 고민하고 있습니다. 한번 뵙고 상의하고 싶은데, 조언 부탁드려도 될까요?"


나는 단순히 자문 요청인 줄 알았다.


"네, 좋습니다."



강남, 어느 일식집

고급 일식집이었다. 부사장님은 60대 초반으로 보였다. 온화한 인상이었다.

주문을 하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30분쯤 지났을 때, 부사장님이 본론을 꺼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조언만 받으려는 건 아닙니다. 저희가 그 사업에 관심이 있고, 하고 싶은데요. 사실 저희 쪽에서 이걸 맡아 줄 적임자가 없습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저희가 투자할 테니, 같이 사업하십시다."


당혹스러웠다.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생각… 좀 해봐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천천히 생각해보세요."



밤새도록 계속된 고민

그날 밤, 집에 와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지금 스위스 회사는 편했다. 컨설팅펌에서 '을'로 갈려나가다 '갑'이 된 지 얼마 안 됐는데, 다시 창업자라는 불안정한 위치로?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설렜다.

한국에서 대기업에 다니는 내 대학 동기들도 대리~과장이었고 챗바퀴 같은 삶이었다. 30대 중반. 지금 아니면 언제 도전하나.

며칠을 고민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Go.'


방향은 정했다. 이제 조건을 정리해야 했다.

연봉을 현재 수준의 200%라고 불러볼까? 아니야, 너무 과한데... 아마추어처럼 보이지 않을까?

고민 끝에 170%로 정했다.



2주 후, 다시 만난 자리


"생각 정리되셨습니까?"

"네. 한번 해보겠습니다."

"조건이 있으시다고요?"


나는 심호흡을 했다.


"첫째, 현재 처우의 170% 정도 반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부사장님이 잠깐 생각하더니 물었다.


"현재 어느 수준이십니까?"


나는 액수를 말했다.


"…네. 좋습니다."

'어라? 이게 이렇게 쉽게?'


속으로 놀랐다.


"Squad 구성은 제가 하겠습니다. 인력 운용은 제게 맡겨주시고 개입하지 말아주십시오."


부사장님이 웃었다.


"하하하. 뭐 그야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 사업에 대해서는 저희는 전혀 모릅니다. 법인을 내고 류 선생께 일임합니다."

"저희에게는 Monthly로 Cash Flow만 보고해주십시오."

나중에 알았지만, 부사장님은 공인회계사였다.



회의실을 나오며

회의실을 나오면서 나는 생각했다.


'아… 그냥 200%를 부를 걸…'


땅을 치고 후회했다. 원래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하지만 더 큰 후회는 1년 후에 찾아왔다.

그때는 몰랐다. 2008년 9월, 세계가 무너질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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