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 1. 대학, 그리고 군대

by 미생팀장

이 글은 거창한 성공담도, 감동적인 극복담도 아니다.

그냥... 나중에야 의미가 생긴 장면 하나를 기록해두는 것이다.

내 삶의 초고는 대체로 이런 식으로 시작했다.


대한민국 대부분의 청년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 대학에 왜 가야 하는지, 무엇을 공부하고 싶은지, 공부는 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던 시절이었다.


그저 누구나 똑같은 교복을 입고 도시락 2개를 들고 다니면서 같은 고민으로 하루하루 살았던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대학 입학은 인생의 첫 번째 관문이었으며, 그것을 뚫지 못하면 인생에서 낙오되는 것이었다.


난 꽤 젊잖고 온유하고 정해진 질서에 잘 순응해 가는 그런 평범한 학생이었고, 그냥 억지로 ‘자신을 이겨야 한다’ 라는 군인정신같은 모토를 가지고 무난히 대학에 갈 수 있었다. 내 인생에 대한 의사결정을 해 본 적이 없는 나는 초등학교 교사 출신의 아버지 권고에 따라 사범대학 교육학과에 입학했다.

1학년 첫학기에 학사경고를 먹었다. 4년 내내 공부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다. 내가 진심으로 갈구하고 찾던 길이 아니었으므로 고교때의 압박감에 벗어난 나로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으리라…


2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가야 했다. 당시 남학생 사이에서는 ‘남자라면 당연 육군이지 !!’ 라는 근거 없는 기류가 있었다. 학사장교니, 카투사니 너도 나도 해 보겠다고 하던 것을…난 시도조차 해 보지 않았다. 그리고 당.당.하.게 육군에 입대했다.


‘1주일 딱 구르니까 아.. 그거 한 번 해 보기나 할 껄….’


하고 후회했다.


입대 당시, 아무런 주특기가 (심지어 운전면허까지도) 없던 상태였다. 논산훈련소에서 땅개로 기본훈련을 마치고 역시 논산에서 후반기 훈련(이것은 아무 주특기 없는 사람을 대상으로)으로 박격포 주특기를 부여 받고 훈련 받았다. 운전병이나 통신병 등은 주특기를 찾아갔지만…

남양주에 위치한 자대에 배치 받아, 예하 부대로 배치를 대기하고 있는 동안 한 기간병 왈,


“야.. 너희 그 신상명세서 글씨 잘 써라. 군대는 글씨야. 글씨만 잘 쓰면 풀린다!”

모나미 0.7 볼펜을 부러질 정도로 꼬옥 부여잡고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갱지 위의 성명, 주소, 키, 몸무게 등을 써 내려갔다.


그리고 난….


얼떨결에 사단의 ‘모필병’ 이 되었다.


사단에 하나 밖에 없다는 그 모.필.병 ! 사단의 얼굴이라고도 한다.

당시 인터넷도 없고, 워드는 하나워드를 썼으며, 각종 차트병들이 그 명성을 드높이던 그 시절. 모필병은 차트병과는 견줄 수 없는 존재였다. 붓으로 사단장 표창장을 써 내려가는 사람이다. 거기다 상황실의 상황판도… 심지어 부대 앞의 집채만한 돌땡이에다가 큰 붓에다 페이트를 묻혀 “초전박살” 이라고 새긴 적도 있다.

하지만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PC의 파워와 리셋을 구분 못하던 내 자대 동기가 2주 동안 밤에 끌려가서 작업하더니만 400타를 넘기던 그 시절,

난 점호 후 사무실에 올라가서 32면 일간신문에 5cm 간격으로 줄을 그어 놓고 32면을 모두 붓글씨를 채워서 매일 아침 제출해야 했다. 이등병 그 시절 취약 시간인 새벽 2시-4시 경계근무까지 포함하면 사실상 잠은 잘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 시절을 버틸 수가 있었는지…


하지만 붓글씨는 워드의 타자와 달랐다. 6개월을 삽질을 했는데도 글씨는 400타 나와서 여유를 찾아가는 내 동기처럼 내게 여유를 주지 않았고 나는 내 사수에게 밤마다 시달릴 수 밖에 없었다. 사수는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따라와서 라면을 끓여 먹거나 여유있게 '별밤'을 들으면 담배를 피웠고 가끔씩 글씨 연습을 하는 내 등 뒤에서 서늘하게 지켜보다가 뒤통수를 휘갈기는 것이 일이었다.


나도 살아야하니 노력했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안된다. 자판 속도 나오는 내 동기는 되는데 글씨는 정말 안되더라... 나는 안되는 일이라고 나중에는 자포자기하여 ‘꼴통’으로 찍혀서 예하 연대로 내려가려고 잔머리까지 썼던 기억도 있다.


하지만 군대는 어떤 곳인가? 1년만 지나면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뀐다는 곳 아닌가...


1년 후, 내공이 쌓였던 것일까? 어느 순간 글씨가 나오기 시작했다.

뭐랄까… 감이 왔다고 해야 할까…갑자기 내 손이 내 뇌와 따로 놀기 시작하면서 글씨가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역시 군대는 예외가 없구나… 1년이면 되는 것이었다 !!!


그 이후, 난 사단의 얼굴로서 사단에 한 사람 밖에 없는 사람으로서, 아무도 대체할 수 없는 그런 핵심인재(?)로서 자리 잡았다. 예하 연대에서 연대장이 뽀다구 나게 붓으로 연대장 표창장(당시 아래한글 2.1 궁서체로 뽑았었다) 좀 써오라고 연대의 중대장(대위)이 밤에 PX에서 먹을 것 잔뜩 사와서 비벼대곤 했다.

그리고 소장, 중장, 대장도 무섭지 않다던 ‘병장’ 이 되었고 나의 군기는 빠질대로 빠져 있었다.


그리고 일년에 두 번 밤샌다는 날 중 한 번인 ‘사단 창설 기념일’.

행사 전날은 수십장의 표창장을 쓰느라고 밤 새운다. 밤 2-3시가 지나면 집중력이 떨어진다. 내가 병장일 때 사단장이 바뀌었다. 써내려간 표창장 중, 몇 장의 사단장 이름을 예전 사단장으로 써 버렸다. 행사 당일 아침까지도 몰랐다. 행사가 진행되면서 알았다.


‘오.마.이.갓 !’

동물적 감각으로 쎄함이 몰려온다.


행사 후, 여지 없이 두 명의 헌병이 짚차타고 나에게 왔다. (헌병은 왜 하이바를 항상 그렇게 눈도 안 보이게 쓰는 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 위압감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그렇게 끌려가서 15일 사단 영창을 살았다. 참고로 총기 사건 등의 큰 사건은 상급 부대인 군단이나 군사령부로 송치되고 소위 말하는 '빨간 줄' 이 올라간다. 나는 그 정도의 사건은 아니라 사단 영창이고 다행히(?) 기록에 남는 것은 아니었다.


영창에서 복귀한 날에는 나는 이미 스타였다. 올림픽 금메달 따고 금의환향 하듯, 모든 부대원들이 존경(?)의 눈치로 환영해줬다.

그 이후로 전역하기까지 붓으로 별 짓을 다 한 듯하다. 말년 고참의 연예편지를 화선지에 세로로 써 주기까지 했다.


사랑하는 oo씨, 다크니스의 의미를 아십니까? 당신을 향한 나의 마음은 깊은 다크니스 어딘가를 헤매고 있습니다...


아직도 오글거린다. 말년 병장 고참이 말로 불러주면 내무실에서 쪼그리고 엎드려서 화선지에 붓으로 써내려갔다.

먼저 전역하는 고참의 향후 성공적 사회 생활을 위해 대한민국 육군 사단장 표창장을 써 주기도 했다.


그렇게 저렇게 전역을 하고 학교로 돌아왔다. 말년에 뭘 할지는 모르겠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여전히 모르는 상태에서 복학하기조차 두려웠다. 그래서 막연하게 Vocabulary 22000 공부를 했던 기억이 난다. 내 또래 말년의 대부분이 영어공부나 독서, 자격증 공부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복학했다.


복학해서 뭐가 달라졌나고 묻는다면...글쎄.

여전히 나는 뭘 하고 싶은지 몰랐다. 다만 군대에서 배운게 하나 있다면,

나는 "원해서" 뭘 시작하는 사람이라기보다, 얼떨결에 던져진 자리에서 이상하게 끝까지 버티는 쪽이라는 사실이었다.


이건 그 초고의 첫 페이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