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5분만 일찍 나갔어도

by 미생팀장


2010년 3월, 또다시 무너지는 세상

입사한 지 9개월쯤 지났다. 일은 적응했다. 교육 프로그램 기획, 강사 섭외, 과정 운영. 익숙한 일이었다. 사업할 때 했던 일과 비슷했다. 팀원들도 좋았다. 팀장님도 합리적이셨다.


'이제 괜찮아진 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날 오후였다. 사업본부장 긴급 회의 소집 메일이 떴다.


"전 직원 대강당 집합. 오후 3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대강당은 금세 가득 찼다. 수백 명의 직원들이 웅성거렸다.


"무슨 일이래?"

"글쎄. 좋은 소식은 아닐 것 같은데."


본부장이 단상에 올랐다. 마이크를 잡았다.


"여러분."


대강당이 조용해졌다.


"오늘 어려운 말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시장 상황이 급변하면서, 우리 사업본부의 방향을 재검토하게 되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본부장이 잠시 말을 멈췄다.


"00사업본부는 이번 하반기를 마지막으로 구조조정에 들어갑니다."

웅성.


"모든 인원은 계열사 포함 다른 조직으로 재배치될 예정입니다."

"인사팀에서 개별 면담을 통해 안내드릴 것입니다."


대강당이 술렁거렸다. 나는 의자에 앉아 멍했다.


'설마… 또?' '겨우 9개월 만에… 또?'



L화학으로

4월 중순. 팀장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류 과장님, 저 000입니다."

"네, 팀장님."

"인사팀에서 배치 안이 나왔다고 하네요."

"어디로 가게 됐나요?"

"L화학으로 가시게 됐습니다."

"L화학이요?"

"네. 같은 그룹 계열사죠. 건자재 쪽 회사입니다."

"…."

"거기 부장님이 과장님 프로필 보시고 좋다고 하셨답니다."

"…알겠습니다."

"과장님 바람이랑은 좀 다를 수 있는데, 일단 가보세요."


전화를 끊고. 인터넷으로 L화학을 검색해봤다. 건자재, 인테리어 소재 등을 만드는 회사. 업무 내용을 보니. 내가 기대했던 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거기 아니면 어디로 갈 것인가.



2010년 5월, 견딜 수 없는 하루하루

L화학. 첫 출근.


"반갑습니다. 류 과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프로필 보니까 괜찮으시더라고요. 잘 해주실 거라 믿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업무 인수인계를 받았다. 듣고 있는데.


'이건… 내가 할 일이 아닌데.'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지금 내 입장에서 뭘 더 바랄 수 있겠는가.

출근길이 괴로웠다. 일이 재미없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오늘도 가야 하나.'


저녁이 되면.


'내일도 또 가야 하나.'


3개월을 채우지 못했다. 6월 말. 나는 결심했다.


'나랑 맞지 않아.' '계속할 수 없어.'


이미 다른 회사들에 이력서를 내기 시작했다. 스포츠 브랜드 회사. 면접을 봤다. 1차, 2차, 3차. 최종 합격. 다음 주 월요일 출근.


'드디어… 여기서 나간다.' '어렵게 어렵게 L그룹과 연이 닿았건만…' '나와 연이 없나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2010년 7월 첫째 주 화요일, 여의도 트윈타워

그날 아침이었다. L화학에서 여의도 L전자 본사로 업무차 들렀다. 서류를 전달하고, 1층 로비로 내려왔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사람들이 붐볐다. 출근 시간이었다.


"류 과장님?"

뒤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쳤다. 돌아봤다.


"앗. 상무님!"

내가 잠시 몸 담았던 L전자 0000사업본부 인사담당. 지금은 본사 인사담당이 되어 계셨다. 백상무님이었다.


"백상무님! 오랜만입니다!"

"그러게요. 여기서 만나네요. 지금 어디 다니세요?"

"L화학입니다."

"L화학? 그쪽으로 가셨군요."


백상무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어떠세요? 괜찮으세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백상무가 내 표정을 읽었다.


"…그렇군요."

침묵.


"오늘 시간 되세요?"

"네?"

"오후 3시쯤. 29층 제 사무실로 올라오세요."

"차 한잔 합시다."



오후 3시, 29층

29층. 백상무의 사무실.


"앉으세요."

커피를 건네받았다.


"류 과장님, 솔직히 물어봐도 될까요?"

"네."

"지금 어떠세요? L화학에서 일하는 게."


나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숨길 이유가 없었다.


"…잘 못 지냅니다."

"그럴 줄 알았어요."


백상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필 좀 봤는데요. 교육학 전공에 컴퓨터공학도 했더군요."

"네, 맞습니다."

"재미있는 조합이네요. 특이하고."

"그렇게들 말씀하십니다."


백상무가 잠시 생각하더니.

"제가 자리를 하나 추천드릴게요."

"네?"

"여기 L전자 본사에 연 팀장님이라고 계세요. 제 선배님이기도 하시고."

"SW역량강화팀이라고, 개발자 교육하고 육성하는 팀인데."

"과장님 프로필이랑 딱 맞을 것 같은데요."

"정말요?"

"제가 이야기를 좀 해놓을 테니 일단 만나보세요."

"감사합니다!"

"언제 시간 되세요?"

"내일이라도 괜찮습니다!"


백상무가 웃었다.


"급하시네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이해합니다. 제가 연락해볼게요."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하철 안. 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백상무님…' '오늘 아침 트윈타워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다음 주면 스포츠 브랜드 회사로 출근할 뻔했다.' '그럼 지금의 이 기회는…'


소름이 돋았다. 인생이란 게 이런 건가. 타이밍. 우연. 한 순간의 만남. 그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



7월 둘째 주 금요일, 연 팀장과의 만남

L전자 본사 23층. SW역량강화팀. 연 팀장의 사무실.


"류 과장님, 반갑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연 팀장은 50대 중반으로 보였다. 온화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분이었다.


"백상무님한테 이야기 들었습니다."

"네."

"프로필 좀 봤는데요. 흥미롭더군요."


연 팀장이 서류를 펼쳤다.


"교육학 전공, 미국에서 컴퓨터공학 전공."

"컨설팅 회사, 외국계 회사, 그리고 교육 사업."


연 팀장이 고개를 들었다.


"우리 팀에 딱 맞는 프로필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팀이 뭐 하는지 아세요?"

"대략은 들었습니다."

"개발자들 교육하고 육성하는 팀입니다."

"사내 LMS도 운영하고, 부트캠프도 하고, 각종 교육 프로그램도 기획하고."

"과장님이 사업하실 때 했던 일이랑 비슷할 겁니다."


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저… 정말 하고 싶습니다."


연 팀장이 미소 지었다.


"좋습니다. 제가 인사팀에 이야기해볼게요."

"한 일주일 정도 걸릴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일주일 후

백상무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류 과장님, SW역량강화팀으로 이동 확정되었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하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됐다.' '드디어.'


2009년 1월 영등포 노동부 지청. 그날부터 1년 반. 긴 터널이었다.

사업 실패, 실업, 아버지께 손 벌리기, 겨우 잡은 자리, 또다시 위기, 계열사 전배. 그 모든 것을 지나.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



2010년 7월 26일 월요일, 첫 출근

L전자 본사 23층. SW역량강화팀.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출근하는 류00입니다."


연 팀장이 악수를 청했다.


"환영합니다. 열심히 해보죠."

"네! 잘 부탁드립니다!"


자리로 안내받았다. 컴퓨터를 켰다. 모니터를 바라봤다. 창밖으로 한강이 보였다.


'여기다.' '여기가 내 자리다.'



그날 밤, 일기

"2010년 7월 26일. 드디어 내 자리를 찾았다. 1년 반 만이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우연이 필요했는가.

여의도 트윈타워 1층 로비. 백상무님과의 만남. 만약 그날 아침, L화학에서 트윈타워로 업무차 오지 않았다면. 만약 5분만 일찍 나갔어도. 만약 다른 엘리베이터를 탔어도. 지금 여기 없었을 것이다.

인생은 運九技一. 운이 9, 실력이 1.

이제야 그 의미를 안다. 내 실력으로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다. 운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하지만 운이 찾아왔을 때, 그것을 잡을 준비는 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이 그 1의 기술이다.

이제 시작이다.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겠다."



15년 후

2025년. 나는 그 팀의 2대 팀장이 되어 있다. 연 팀장님은 정년퇴임하셨고, 나에게 팀을 넘기셨다.

가끔 2009년 영등포 노동부 지청을 떠올린다.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번호표를 들고 있던 그 순간.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던 그 시간.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환란은 끝나지 않았고, 나는 바닥까지 갔다가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그 바닥에서, 가장 큰 교훈을 얻었다.

인생은 運九技一.

하지만 운은 아무에게나 오지 않는다. 운은 준비된 자에게 온다. 그리고 온 운을 알아보고 잡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기회가 된다.

2010년 7월 그날 아침. 만약 내가 백상무님을 못 알아봤다면. 만약 내가 솔직하게 "잘 못 지냅니다"라고 말하지 못했다면. 만약 내가 "내일이라도 괜찮습니다"라고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면. 지금 여기 없었을 것이다.

운은 왔지만, 그것을 잡은 것은 나였다. 그것이 運九技一의 진짜 의미다.

운이 9할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함. 하지만 그 1할의 기술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치열함. 그 두 가지가 만났을 때. 비로소 인생이 열린다.

2009년 그 겨울. 나는 바닥에 있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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