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늦가을, 저녁 7시. 말죽거리 시장 골목 안쪽의 허름한 선술집. 아직 해가 완전히 지지 않았는데도 골목은 벌써 불을 켠 간판들로 환했다. 생선구이 냄새와 김치찌개 냄새가 뒤섞여 퍼졌다.
이준석 책임과 나, 둘이서 오랜만에 자리를 잡았다. 낮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며, 초반에는 이런저런 가벼운 이야기들을 나눴다. 최근 본 드라마 이야기, 프로젝트 진행 상황, 날씨 타령.
한 병이 비워지고 두 번째 병을 따를 무렵. 나는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이 책임님."
"네?"
"하나 물어봅시다."
그가 소주잔을 내려놓고 나를 봤다.
"다소 디프레스되는 것이…"
나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어갔다.
"본인이 하고 있는 그 일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그 일 자체가 싫어진 건가요?"
침묵이 흘렀다. 선술집 주방에서 칼질하는 소리, 옆 테이블 손님들의 웃음소리만 들렸다. 이준석 책임이 천천히 소주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
"아… 쉽지 않은 질문입니다…"
그는 빈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전자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내가 새 병을 따며 말했다.
"나는 이책임께서 절묘하게 두 가지를 다 가지신 것 같은데, 저 하고 한 번 같이 해 보실래요?"
"..."
당시 나는 전사 Software Architect 전문가 육성 프로그램의 담당자였다. 소프트웨어 개발에서 '아키텍트'는 최상위 레벨의 설계 전문가다. 건축가가 하는 역할과 유사하다. 요구사항을 분석하고, 전체 시스템의 구조를 설계하며, 개발 방향성을 제시한다.
L전자에서 이 프로그램은 이제 막 시작 단계였다. 각 사업본부마다 뛰어난 개발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을 체계적으로 육성하고 인증하는 시스템이 없었다. 나는 각 본부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B사업본부에서 열린 '개발자 Day' 행사 자료가 내 이메일로 날아왔다. 행사 프로그램을 훑어보다가 한 이름에 시선이 멈췄다. '이준석 책임 - 전체 진행 및 세션 리더'
나는 바로 B사업본부 개발자 커뮤니티 사이트에 접속했다. 최근 게시물 대부분이 그의 이름으로 올라와 있었다.
"다음 주 세미나 안내 - 클린 코드에 대하여"
"지난 세션 후기 - 참여해주신 50분께 감사드립니다"
"신입 개발자분들께 - 멘토링 신청 받습니다"
댓글도 활발했다.
"이 책임님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다음 세션도 기대됩니다"
나는 그의 이력을 찾아봤다. 입사 15년차. 개발 경력은 탄탄했다. 프로젝트 리더 경험도 여러 차례. 그리고 3년 전, Software Architect 인증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었다.
'이 친구… 주목할 만하네.'
나는 그의 이름을 메모장에 적어두었다.
1년 후, 전사 개발자 컨퍼런스가 열렸다. 판교 본사 대강당. 500명 넘는 개발자들이 모였다. 나는 뒷자리에 서서 행사 진행을 지켜보고 있었다.
행사 진행은 B사업본부 팀이 맡았다. 리더는 역시 이준석 책임이었다. 마이크를 잡은 그의 목소리는 자신감이 넘쳤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왜 여기 모였을까요?"
"제품을 만드는 사람들, 코드를 짜는 사람들, 버그와 씨름하는 사람들."
"우리는 L전자의 소프트웨어를 책임지는 사람들입니다."
청중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는 계속 이어갔다.
"하지만 우리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고 있을까요?"
"우리가 만드는 기술이 충분히 존중받고 있을까요?"
"아니라면, 우리가 직접 바꿔야 합니다."
더 큰 박수. 나는 무릎을 쳤다.
'이 친구가 하는 일이 바로 Developer Advocate구나.'
Developer Advocate. 개발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개발 문화를 만들어가는 사람. 사업 조직도 아니고, 직접 개발 조직도 아닌, 어찌 보면 애매한 위치. 돈을 버는 일도 아니고, 직접 제품을 만드는 일도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 그리고 이준석 책임은 그 일을 자발적으로, 열정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해 봄, B사업본부에 지각변동이 있었다. 조직 구조조정. 이준석 책임이 속한 팀이 사실상 해체되는 수순을 밟았다. 그는 우리 팀 문을 두드렸다.
당시 우리 팀장은 연 팀장이었다. R&D HR 분야에서 20년 넘게 일해온 베테랑. 인사의 원칙과 기준이 명확한 분이었다. 나는 연 팀장실 앞 복도에서 면담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30분쯤 지났을까. 문이 열렸다. 이준석 책임이 나왔다. 얼굴이 굳어 있었다. 내 옆을 지나가며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안 된답니다..."
나는 팀장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팀장님, 이준석 책임 건은 어떻게 된 겁니까?"
연 팀장은 서류를 정리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안 됩니다."
"왜요? 경력도 충분하고, 아키텍트 인증도 받았는데."
"나이."
"네?"
"나이가 너무 많아요."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팀장님, 요즘 시대에 나이가…"
"류 과장."
연 팀장이 나를 쳐다봤다.
"우리 팀 구성을 생각해봐요. 젊은 팀이잖아요."
"거기에 15년차 책임을 받으면 팀 밸런스가 안 맞아요."
"알겠습니다."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연 팀장의 논리는 나름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복도를 걸어 나오며 생각했다.
'저 친구가 나이가 많은 게 문제가 아니야.' '오히려 경험이 풍부한 게 장점인데.'
결국 이준석 책임은 우리 팀으로 오지 못했다. 대신 CTO 부문 산하 연구소의 아키텍처 전문 팀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그는 개발자 컨퍼런스를 본격적으로 키워나갔다. 첫 해 300명. 다음 해 500명. 그 다음 해 700명. 매년 규모가 커졌다.
하지만 이준석 책임의 상황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Developer Advocate 업무는 화려해 보이지만, 평가받기 어렵다. 직접 매출을 만들지 않는다. 제품을 개발하지도 않는다. KPI를 숫자로 보여주기 어렵다.
"컨퍼런스 참가자 수? 만족도 점수?"
이런 지표들은 성과 평가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2018년 봄에는 카카오 이직 소동도 있었다. 최종 합격까지 했지만, 컨퍼런스를 끝까지 책임지기 위해 이동 시기를 놓쳤다. 그리고 하반기, 이준석 책임이 잠깐 리드했던 '개발 문화 혁신 TF'는 6개월 만에 공중분해되었다.
"개발 문화를 만든다는 게 도대체 뭡니까?"
"숫자로 보여주세요."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동병상련이다.'
우리 팀도 다르지 않았다. 개발자 육성? 역량 강화? 우리도 직접 돈을 버는 조직이 아니었다. 지원 조직. Staff 부서. 빛날 수 없는 identity. 이준석 책임의 고민은 곧 우리의 고민이었다.
나는 작심했다.
'저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 팀에 꼭 필요한 사람이다.'
어느 날 오후, 나는 연구소장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니, 최성현 상무가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상무님, 시간 괜찮으십니까?"
"앉으세요. 무슨 일이에요?"
나는 의자에 앉아 바로 본론을 꺼냈다.
"컨퍼런스 말입니다."
"컨퍼런스?"
"네. 개발자 컨퍼런스요."
최 상무가 안경을 고쳐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준석 책임이 하던 거."
"맞습니다."
"그게 어떻게 됐죠? Task 해체됐다던데."
"네, 해체됐습니다."
"그럼 컨퍼런스는?"
"애매해졌습니다."
최 상무가 팔짱을 꼈다.
"그러게… 애매하네…"
"하던 걸 안 할 수도 없고."
"그럴 명분도 없고."
"제게 주십시오."
순간, 침묵이 흘렀다. 최 상무가 나를 쳐다봤다.
"뭐?"
"컨퍼런스를 저희 팀으로 주십시오."
"저희 팀이 맡아서 해보겠습니다."
"흠…"
그가 의자에 기대며 생각에 잠겼다.
"가능하겠어요? 류 팀장 팀도 일이 많잖아요."
"가능하게 만들어보겠습니다."
"그래요? 근데…"
최 상무가 날카롭게 물었다.
"왜 하려고 해요? 팀한테 득이 되는 일도 아닐 텐데."
나는 준비한 답을 꺼냈다.
"상무님."
"우리 팀이 하는 일이 뭡니까?"
"개발자 육성과 역량 강화."
"맞습니다."
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런데 우리가 책상에 앉아서 제도만 만들고 프로그램만 설계하면 됩니까?"
"아니죠."
"개발자들이 진짜 원하는 게 뭔지, 현장에서 무슨 고민을 하는지 알아야죠."
"컨퍼런스가 바로 그 접점입니다."
"700명 개발자가 모이는 자리를. 우리가 직접 만들고 운영하면…"
최 상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는 있네요."
"그런데 그거 준비하려면 사람이 필요할 텐데."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서 하나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이준석 책임을 저희 팀으로 조직 이동시켜 주십시오."
최 상무의 눈이 커졌다.
"이준석 책임을?"
"네."
"본인과 이야기는 해본 건가요?"
"네. 다 조율했습니다."
"흠…"
최 상무가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이준석 책임… 능력은 있는데 포지셔닝이 애매했죠."
"맞습니다. 그래서 더 필요합니다."
"우리 팀에는 아키텍트 백그라운드를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기술적 깊이가 필요한 순간이 많은데, 지금은 외부 자문을 받아야 해요."
"이준석 책임이 오면 그 부분이 해결됩니다."
최 상무가 생각에 잠겼다. 30초쯤 지났을까.
"좋아요."
"네?"
"해보세요. 조직 이동, 승인하겠습니다."
나는 깊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문을 나서려는데, 최 상무가 불렀다.
"류 팀장."
"네."
"잘 챙겨주세요."
"그 친구, 능력은 있는데 많이 힘들어했어요."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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