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전자 본사 23층.
SW역량강화팀.
킥오프 미팅에서 나는 팀원들에게 소개했다.
"여러분, 오늘부터 우리 팀에 합류하신 이준석 책임님입니다."
"15년차 베테랑이시고, SW Architect 인증도 받으셨어요."
"그리고…"
나는 잠시 멈췄다가 이어갔다.
"이제 전사 개발자 컨퍼런스를 우리가 직접 운영합니다."
"이 책임님이 리드하시고, 우리 모두 힘을 합치면 됩니다."
박준영 책임이 손뼉을 쳤다.
"환영합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이준석 책임은 적응에 애를 먹었다.
3개월쯤 지났을 때, 그가 내 자리로 왔다.
"팀장님."
"네, 말씀하세요."
"제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왜요? 컨퍼런스 준비 잘 하고 계시잖아요."
"그게 아니라…"
그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팀장님, 저는 개발자예요."
"코드를 짜고, 설계를 하고, 기술 문서를 만드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여기서는…"
"HR 관점으로 제도를 만들고,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저한테는 너무 낯설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그런데 이 책임님."
"우리 팀이 뭐 하는 팀인지 아시죠?"
"개발자 육성이요."
"맞아요. 개발자를 육성하는 팀이에요."
"그럼 우리 팀에 개발자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
"개발자의 시각으로 봐야 할 것들이 있어요."
"기술적 깊이가 필요한 순간이 있어요."
"이 책임님이 바로 그 역할을 해주시는 거예요."
그는 여전히 불안한 표정이었다.
2019년 여름, 컨퍼런스가 열렸다.
우리 팀 주관으로 하는 첫 컨퍼런스였다.
참가자 850명.
역대 최대 규모였다.
세션도 다채로웠다. 기술 트렌드, 개발 방법론, 경험 공유.
이준석 책임은 오프닝 스피치를 맡았다.
"여러분, 올해로 5회째를 맞는 L전자 개발자 컨퍼런스입니다."
"하지만 올해는 특별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 팀 방향을 가리켰다.
"이제 이 컨퍼런스를 SW역량강화팀에서 공식적으로 운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목소리가 회사의 공식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컨퍼런스는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다시 말죽거리 선술집.
이준석 책임과 나, 둘이서 소주잔을 기울였다.
한 병이 비워지고 두 번째 병을 따를 무렵.
나는 물었다.
"이 책임님, 하나 물어봅시다."
"네?"
"다소 디프레스되는 것이… 본인이 하고 있는 그 일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그 일 자체가 싫어진 건가요?"
침묵이 흘렀다.
이준석 책임이 천천히 소주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쉽지 않은 질문입니다…"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전자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하나 더 물어봅시다."
내가 새 병을 따며 말했다.
"본인은 개발자인가요, 스텝인가요?"
"이 책임님.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나는 잔을 들고 그를 쳐다봤다.
"지난 1년 동안, 저도 많이 고민했습니다."
"제가 이 책임님을 데려온 게 맞는 결정이었을까."
"팀장님…"
"아니, 들어보세요."
나는 소주를 단숨에 비우고 말을 이었다.
"이 책임님은 아키텍트예요. 설계의 전문가죠."
"그런 분이 HR 업무를 하려니 답답하실 거예요."
"개발도 아니고, HR 전문가도 아니고."
"어정쩡하다고 느끼실 수 있어요. Identity의 문제거든요."
이준석 책임이 고개를 숙였다.
"…맞습니다."
"작년에 한 번 팀장님께 말씀드리려다 참았어요."
"그냥 다시 개발팀으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아서요."
나는 새 병을 따며 천천히 말했다.
"이 책임님."
"이도 저도 아닌 게 아니에요."
이준석 책임이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둘 다 가진 거예요."
"네?"
"개발과 HR, 둘 다 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양쪽을 겸비한 거예요."
나는 잔을 들어 그와 부딪쳤다.
"우리 팀에 개발 라인의 최고 권위자인 아키텍트가 있다는 거. 자랑입니다."
"그리고 설계 쪽 일을 하셨다 보니, 그런 전문성이 우리 일에도 잘 녹아들고 있어요."
"특히…"
나는 강조하며 말했다.
"Documentation 역량. 탁월합니다."
"집요하리만큼 기록을 잘하고 계세요."
"개발자 육성 프로그램 문서화할 때, 이 책임님 손을 거치면 완전히 달라져요."
"그게 바로 아키텍트의 능력이에요."
이준석 책임의 눈이 조금씩 밝아졌다.
"그리고 컨퍼런스."
나는 계속 이어갔다.
"이 책임님이 아니면 못 해요."
"700명, 800명을 움직이는 행사를 기획하고 실행하는 거."
"기술도 알아야 하고, 사람도 다룰 줄 알아야 하고, 조직도 이해해야 해요."
"이 책임님은 그 세 가지를 다 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개발도 이해하고, 사람도 다루고, 조직도 아는."
"그게 바로 양쪽을 겸비한 사람입니다."
선술집 주방에서 생선 굽는 냄새가 퍼졌다.
이준석 책임이 천천히 소주잔을 들었다.
"팀장님."
"네."
"제가…"
그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제가 들어본 피드백 중에 최고인 것 같습니다."
"그동안… 정말 힘들었어요."
"뭘 해도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고."
"나이는 먹었는데 포지셔닝은 애매하고."
"카카오 갈 때도… 미련이 남았어요."
그가 소주를 단숨에 비웠다.
"근데 오늘…"
"팀장님 말씀 듣고 나니까…"
"제가 가진 게 약점이 아니라 강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나는 웃으며 그의 잔에 소주를 가득 따랐다.
"맞습니다."
"이도 저도 아닌 게 아니에요."
"둘 다 할 수 있는 거예요."
“겸비한거죠.”
우리는 잔을 부딪쳤다.
"개발과 HR, 둘 다요."
사람들은 자신을 하나로 정의하려 한다.
"나는 개발자야."
"나는 PM이야."
"나는 기획자야."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준석 책임은 개발자였다. 15년간.
그런데 이제 HR 업무도 하고 있다.
그는 혼란스러워했다.
'나는 뭐지?'
'개발도 아니고, HR도 아니고.'
'이도 저도 아닌 건가?'
아니다.
그는 이도 저도 아닌 게 아니다.
둘 다인 것이다.
개발도 이해하고, HR도 이해하는 사람.
기술도 알고, 사람도 다루는 사람.
설계의 정교함과 행사의 열정을 동시에 가진 사람.
그것이 바로 양쪽을 겸비한 사람이다.
이준석 책임의 링크드인을 보면 본인을 ‘개발자의 심장을 건드리는 종합예술가’ 라고 설명한다.
리더의 역할은 뭘까.
팀원의 약점을 지적하는 것?
아니다.
팀원이 자신의 강점을 깨닫지 못할 때.
"당신은 이도 저도 아닌 게 아니라, 둘 다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해주는 것.
그것이 리더의 역할이다.
2019년 늦가을, 말죽거리 선술집.
나는 이준석 책임에게 그 말을 해줬다.
그리고 그는 비로소 자신의 가치를 깨달았다.
이도 저도 아닌 게 아니라.
둘 다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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