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142번 고객님, 5번 창구로

by 미생팀장


2009년 1월 15일 목요일

영등포 노동부 지청 대기실.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번호표를 쥐고 있었다.


"137번 고객님, 3번 창구로 오십시오."


방송이 울렸다. 내 차례는 아니었다. 나는 142번이었다.

대기실을 둘러봤다. 50대로 보이는 아저씨가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옆에는 40대 후반쯤 되는 여성이 핸드폰을 붙잡고 있었다.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응… 알았어. 엄마가 오늘 일 보고 집에 갈게. 저녁은 냉장고에 있는 거 데워 먹어."


구직자들. 아니, 실업자들. 그리고 나도 그 중 하나였다.

30대 중반, SKY, 미국 유학, 사업가 출신. 그런 스펙이 무슨 소용인가. 지금 나는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실업자일 뿐이었다.


"142번 고객님."


고개를 들었다.


"5번 창구로 오세요."


일어서서 창구로 갔다.


"구직 활동 증명서 가져오셨어요?"

"네."


서류를 건넸다. 담당 직원이 서류를 훑어보더니 도장을 찍었다.


"다음 달 15일까지 오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창구를 나왔다. 은행 ATM으로 갔다. 통장에 80만 원이 찍혔다. 실업급여. 이게 내 한 달 생활비 전부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왔다. 밖은 1월의 매서운 추위였다. 하지만 더 추운 것은 내 마음이었다.



세 달간의 거짓말

2009년 1월, 아침 8시. 아침 일찍 나섰다. 지하철을 타고 강남역으로 향했다. 구직 활동. 집에서는 내 일자리를 찾으로 부산히 다니는 것으로 알았다. 하지만 내 자리를 찾는 게 아니었다.

카페에 앉았다. 핸드폰을 꺼냈다. 민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민수야. 오늘 면접 어떻게 됐어?"

"좀… 애매한 것 같아요."

"왜? 무슨 일 있었어?"

"아니 그게… 연봉이 너무 낮게 나왔어요. 지금 받던 것보다 30% 깎인 금액이에요."


나는 한숨을 쉬었다.


"민수야. 지금은 그런 거 따질 때가 아니야. 일단 들어가는 게 중요해."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재훈에게 전화했다.


"재훈아, 어제 그 광고회사 면접은 어땠어?"

"형… 떨어졌어요."

"왜? 네 경력이면 충분한데."

"외국계 경력만 인정해준대요. 국내는 경력으로 안 쳐준다고…"


나는 벽을 쳤다. 하지만 목소리는 담담하게 유지했다.

"괜찮아. 다음 기회가 있을 거야. 이력서 좀 더 넣어보자."


하루 종일 그렇게 카페를 돌아다니며 전화했다. 민수와 재훈의 면접 일정을 체크하고, 다음 지원처를 찾아주고, 이력서를 첨삭해주고.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일을 3개월 동안 했다. 2월, 민수가 먼저 자리를 잡았다. SI 회사였다. 연봉은 이전보다 낮았지만 어쨌든 일자리였다. 4월, 재훈도 중견 회사 마케팅팀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 나는 내 일자리를 찾지 않았다. 그것이 그들을 데리고 온 사람의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5월, 마지막 실업급여

5월 15일. 마지막 실업급여를 받았다. 통장 잔고 230,000원.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 나는 핸드폰을 꺼냈다. 전화번호부를 스크롤했다. 그리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아버지, 저예요."

"오, 아들. 무슨 일이야?"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40년을 살면서 아버지께 돈을 빌려달라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버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돈 좀 빌려주실 수 있으세요?"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 아버지가 물었다.


"얼마나 필요해?"

"200만 원만… 생활비로…"


아버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알았다. 내일 보내줄게."

"…죄송합니다."

"괜찮아. 힘든 시기니까. 아들, 너무 자책하지 마."


전화를 끊고. 나는 지하철 안에서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6월, 희망

6월 초.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류00 선생님 맞으시죠? L전자 인사팀입니다."


심장이 뛰었다.


"네, 맞습니다!"

"지원하신 00사업본부 인재육성팀 건으로 연락드렸습니다."

"네."

"합격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

"다음 주 월요일 오전 10시에 본사로 와주시면 입사 절차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됐다.' '드디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6개월 만이었다. 6개월간의 암흑기가 끝났다.



2009년 6월 15일, 첫 출근

L전자 본사. 여의도. 정문을 지나 엘리베이터를 탔다. 15층. 00사업본부 인사팀.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출근하는 류00입니다."

"아, 오셨어요. 이쪽으로 오세요."


자리로 안내받았다. 창밖으로 한강이 보였다. 6개월 전, 사업을 정리하러 왔던 그 건물. 그때는 모든 게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다시 여기로 돌아왔다. 다른 신분으로.


'새 출발이다.' '이번에는 잘해보자.'


하지만 그때 나는 몰랐다. 환란은 그날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끝에서, 운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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