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접겠습니다, 라고 말하던 날

by 미생팀장


여의도 한강이 보이는 회의실

12월 초. 투자자 두 분이 회의를 소집했다. 여의도 트윈타워의 한 회의실이었다. 창밖으로 한강이 보였다. 겨울 한강은 유독 차가워 보였다.

부사장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상황이 좋지 않아."


그분은 평소와 달리 말을 아꼈다. 대표님이 내게 물었다.


"류 팀장."

"네."

"솔직하게 이야기해봅시다.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그 질문을 예상하고 있었다. 아니, 지난 한 달간 밤마다 스스로에게 수없이 던졌던 질문이었다. 심호흡을 한 번 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접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그 순간 회의실에 침묵이 흘렀다. 부사장님의 눈빛이 약간 흔들렸다. 나는 계속 말했다.


"자본잠식 상태에 진입했습니다. 현재 세계 경제 상황을 볼 때 단기간 내 반등은 어렵습니다."

"전문가들은 이 위기가 최소 2-3년은 간다고 합니다."

"오호…"


부사장님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의외네. 난 자네가 그래도 좀 더 가보자고 할 줄 알았어."


대표님이 조용히 물었다.


"정말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저도 계속하고 싶습니다. 제가 데리고 온 친구들도 있고, 면목도 있고…"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지금 멈추지 않으면 자본금을 전부 날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빚으로 버텨야 합니다."

"2-3년을 그렇게 버틸 자신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두 분의 자본금을 모두 날리는 것은 도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대표님이 창밖을 보며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렇게 합시다."



가장 어려웠던 말

그날 저녁. 나는 민수와 재훈을 불렀다. 강남의 작은 술집이었다. 우리가 법인 설립할 때 축하하며 왔던 그곳이었다. 1년 전에는 미래에 대한 기대로 가득했었는데. 이제는 그 끝을 이야기하러 온 자리가 되었다.

맥주 잔을 채우며 민수가 물었다.


"형, 무슨 일이에요? 표정이 안 좋은데."


나는 한참을 말하지 못했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미안하다."


결국 나는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오늘 투자자분들과 회의했어. 그리고… 회사를 정리하기로 했어."


민수와 재훈이 동시에 얼어붙었다.


"뭐라고요?"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재훈이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형, 그게 무슨… 우리 아직 할 수 있잖아요. 경기가 나아지면…"

"상황을 보면… 곧 좋아질 것 같지도 않고…. 그때까지 버틸 수가 없어."


민수가 조용히 물었다.


"자본금이 다 날아갔어요?"

"아직은 아니야. 그래서 지금 멈추는 거야. 지금 접어야 최소한의 피해로…"


내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너희를 데리고 왔는데. 삼성도 그만두게 하고, 좋은 회사도 나오게 해놓고…"

"내가 책임을 못 졌다. 정말 미안하다."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 민수가 말했다.


"형, 우리가 형을 믿고 온 거잖아요."

"누구를 원망하겠어요. 경제가 이 모양인데."


재훈도 거들었다.


"형도 최선을 다한 거 알아요. 우리 다 봤잖아요."

"환율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들의 위로가 오히려 더 가슴을 후볐다. 그날 밤, 우리는 말없이 술을 마셨다. 아무도 먼저 일어서지 못했다.



그날의 교훈들

지금 돌이켜보면, 그 결정은 옳았다. 리먼 사태 이후 세계 경제 위기는 실제로 3년 넘게 지속되었다. 만약 우리가 버텼다면, 자본금을 다 날리고도 회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개인 빚을 지고, 더 깊은 수렁에 빠졌을 것이다.

하지만 옳은 결정이었다고 해서,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리더의 자리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때로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무게를 견디기란 쉽지 않다.


교훈 1: 감정과 논리의 분리

나는 계속하고 싶었다. 두 친구들에 대한 미안함, 투자자들에 대한 죄송함, 나 자신의 자존심. 모든 감정이 "계속하자"고 외쳤다. 하지만 숫자는 명확했다.

환율 1,500원, 매출 제로, 자본잠식.

리더는 감정으로 결정하면 안 된다. 감정을 인정하되, 결정은 논리로 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으로 조직과 사람들을 지키는 길이다. 만약 내가 감정을 앞세워 "조금만 더"를 외쳤다면? 자본금은 다 날아갔을 것이고, 나는 빚을 졌을 것이고, 두 친구는 더 오랫동안 불안 속에서 일했을 것이다.


교훈 2: 빠른 결정이 최선의 결정

많은 리더들이 어려운 결정을 미룬다. "조금만 더 버티면", "다음 달에는 나아질지도", "기적이 일어날지도". 나도 그 유혹에 빠질 뻔했다.

8월에도 알고 있었다. 상황이 안 좋다는 것을. 9월 리먼 사태 때도 알고 있었다. 회복이 어렵다는 것을.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10월까지 끌었고, 11월에 회계사의 경고를 받았고, 12월에야 결정했다.

만약 8월에 결정했다면? 자본금 손실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위기가 왔을 때는 빠르게 결정해야 한다. 미루면 미룰수록, 피해는 커지고, 선택지는 줄어든다.


교훈 3: 책임은 끝까지

회사를 정리한다고 책임이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두 친구들의 다음 자리를 찾아주기 전까지 내 일자리를 찾지 않았다. 그것이 그들을 데려온 사람의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리더는 좋을 때만 리더가 아니다. 무너질 때, 정리할 때, 그 순간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

지금도 가끔 민수, 재훈과 연락한다. 둘 다 지금은 각자의 자리에서 잘하고 있다. 오히려 그 경험이 자신들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때 내가 끝까지 책임지려 노력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관계는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교훈 4: 실패는 끝이 아니다

그 당시에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30대 중반, 사업 실패, 실업자.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그 실패가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이후 L전자에 들어가 팀장이 되고, 조직을 이끌게 되었을 때. 그날의 경험이 내 가장 큰 자산이 되었다.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때. 팀원들에게 나쁜 소식을 전해야 할 때. 위기 속에서 방향을 정해야 할 때.

나는 2008년 그 겨울을 떠올린다. 그때보다 어려운 순간은 없었다. 그걸 견뎌냈으니, 이 정도는 견딜 수 있다.


교훈 5: 진짜 리더십은 무대 뒤에 있다

사람들은 성공한 리더의 비전 스피치를 기억한다.


"우리는 세계 최고가 될 것입니다!"

"5년 내에 시장 1위!"


하지만 진짜 리더십은 그런 무대 위가 아니다. 여의도 회의실, 창밖으로 한강이 보이는 그곳. 아무도 박수쳐주지 않는 순간.


"접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라고 말해야 하는 그 순간.

그 순간에 필요한 것은 카리스마가 아니다. 용기다. 가장 어려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용기. 모두가 불편해하는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 실패를 인정하고, 책임을 지는 용기.

그것이 리더십이다.

2008년 12월, 여의도 사무실에서 내가 배운 것은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교훈은 지금도 내 리더십의 뼈대가 되어 있다.


#사업정리 #어려운결정 #리더의책임 #감정과논리 #빠른결정 #실패의교훈 #진짜리더십 #미생팀장

매거진의 이전글7화. 환율창을 새로고침할 때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