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ㅇ이 에게
여드름쟁이 ㅇㅇ아 그동안 잘 있었느냐 요즈음은
한여름에 활짝 피었던 꽃들도 모두 시들어 버렸는데
네 얼굴에 만발했던 여드름이 이젠 좀 시들어졌는데
너도 Y 이와 더불어 공부하느라 수고가 많다
특히 너는 미술에 재주가 있는데 그것을 잘 키워나가고
있는지 무엇이든 공부 이외에 하는 활동이 있다면
그것은 남보다 더욱 풍부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으니까
잘해 보기 바란다 저 번 편지를 보니까 바쁜 생활에서도
틈틈이 독서 생활을 하고 있다는데 참 바람직한 일이다
공부에 바쁘다고 책은 대학에 가서나 보지 하는 생각으로 생활하며
대학에 들어가서 남는 것은 후회의 한숨뿐이다 바쁠수록
너의 정도에 맞는 책은 골라 학교에서의 지식과 더불어 너 나름
대로의 교양을 쌓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Y 와도 내가
있을 때처럼 마음 변하지 말고 서로 도와가면서 재미나고
유쾌할 생활을 만들도록 해라 같은 값이면 인상 안 쓰고 즐겁게
공부하는 것이 좋지 않겠니
다음에 만날 때는 푸른 제복을 입은 이 형님을 흐뭇하다 할까
하는 눈으로 볼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이 편지를 받은 후
복무확인서의 학교제출 여부를 네가 책임지고 나한테 연락해
주기 바란다 될 수 있으면 신속히 연락하는 것이 내 마음을
편히 하는 것이겠지 항상 건강하고 즐겁게 생활하기를 빈다 - End-
이 편지는 필체도 내용도 단정하다.
봉투가 사라져 보낸 사람의 주소도 이름도 모른다.
Y란 동창과 함께 하숙집 룸메이트였던 것은 알고 있는데
이 사람도 같이 하숙했던 선배였나 보다.
이 시기에 남편은 대학 때문에 많은 고민을 할 때였을 거다
남편은 중학교 때 거의 수재 소리를 들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객지에서 유학하면서부터 망했다.
아버님이 농사지으면서 하숙까지 시키며 공부시킬 때는
정말 많은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났다
바로 미술선생님이다
미술선생님은 남편이 그림에 소질 있다는 것을 알고 미술부에 들게 했다
남편은 미술부를 하면서 전국 미술대회에서 유화 부분 <대상>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학원 다닌 것도 아니고 타고난 소질이 있었나 보다
아무튼 그는 사춘기 때 미술부를 하면서 학업에 소홀했다
아버님은 남편이 의대에 가기를 원했다.
머리 좋고 똑똑했으니 기대할 만했고 충분히 갈 수 있는 실력이었다.
그런데 미술부에 들어가면서 미술대학을 가겠다고 하니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다.
남편은 아버지와 싸우느라 그 귀한 시간들을 허비했다.
미술부 하면서 전시회 하고 전시회에 여학생들도 오고
그렇게 똥 폼 잡고 다녔겠지. 안 봐도 비다오다.
남편은 그때의 상처를 갖고 있다.
작은 녀석이 어려서부터 미술에 타고난 재주가 있었다.
아기 때부터 구석진 곳에서 혼자 놀면서 매일 무언가를 만들고 부숴버리고
아이는 매일 그림을 그렸다.
나는 그 아이를 어릴 때부터 미술관을 데리고 다녔는데
남편은 미술관 가는 것을 싫어했다.
미술관에 그림들을 볼 때마다 그때의 아픔이 ... 그랬었나 보다
“아니 내가 못한 일을 자식이 한다면 더 관심 쓰고 밀어줘야지”
내가 이렇게 말해도 남편은 애들 데리고 미술관은 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작은 녀석이 미국 예술고등학교에 간다고 했을 때
아버님이 자신에게 그러했듯
아이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그리고 그때 많이 후회했을 거 같다
그때 아버지 말 들었으면...... 애들 가르치느라 허덕이는 일도 없었겠지
남편은 자신이 아버지께 속섞이고 불효한 것을 알기에
반항기 많은 작은 녀석이 아빠에게 "따다다다" 속사포로 막말을 던질 때도
" 아이구, 내가 아버지한테 한 것을 되받는구나, 너는 내딸 맞구나"
항상 작은 녀석을 이해하고 귀엽게 다 받아주었다.
우리는 부모님께 받은 것을 부모님께 갚을 수는 없다.
그 빚을 우리는 자식에게 갚는다.
나의 자식들이 그 빚을 또 그 자식에게 갚겠지
그러나 똑똑한 자식들은 이제 그 빚을 갚는 일이 힘든 일인 줄 알기에
자식을 낳지 않는 (아니 낳을 수 없는) 요즘 세대들을 너무나 이해한다.
“ 정말 아깝다 아까워 그 머리로 공부해서 의대를 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남편 앞에서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는데,
남편도 아버지께 불효한 것을 후회한다는 것을 알았다.
남편은 술에 취해서 “ 그 미술선생 내가 만나면 가만 안 둘 거야”라고 말한 적이 한 번 있었다.
아마도 그 사람을 안 만났으면, 그 미술선생이 바람을 넣지 않았다면
아버님이 원하는 아들이 되었을 텐데
동생도 먼저 가고 집안에 가장이 되어 부모님 늙어가시는 것을 보면서
왜 후회를 안 했겠나, 자신을 탓하다가 선생을 탓하고...
그러니 그 트라우마로 아예 미술관도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재주가 있어도 기질로 살아간다.
아무리 재주가 있어도 기질적으로 맞아야 그 삶을 사는 거다
머리 좋고 공부 잘했어도 남편은 기질적으로 의사는 맞지 않았고
아무리 그림을 잘 그렸어도 예술가적 기질에도 맞지 않았다
(그래 이렇게 그것들은 모두 신포도라고 생각하자)
그러나 어쩌겠나.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선택인 것을
삶이란 “ B와 D 사이 C ”라고 하지 않았나. ( Birth와 Dead 사이 Choice)
남편은 평생 연구직에 있으면서 만족하게 살아왔다.
자신의 연구 분야에서 최고가 되었고 인정도 받았다
게다가
아빠는 저 나이 때 저렇게 연애편지나 쓰고 놀았는데
그 자식들은 한시도 허투루 안 쓰고 반듯하게 자신의 길을 잘 개척해가고 있다.
무엇을 더 바라겠나. 그럼 된 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