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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니 Nov 12. 2023

초보 운전자의 화려한 데뷔

 

 지난 화에서 계속


..그렇게 94년식 씨엘로를 몰고 호주 도로에 갓 데뷔한 나는 여느 신참들처럼 텅 빈 무대, 아니 텅 빈 도로에서 시작했다. 브리즈번 시민들은 웬만하면 평일 10시면 집에서 코 주무시기 때문에 화요일 저녁 한인 라디오 방송을 하고 11시 반이 넘어 퇴근하는 길엔 당연히 도로가 텅 비다시피 했다. 파워 핸들만 없었던 게 아니라 내비게이션도 없고, 스마트 폰도 없던 시절 (없는 게 많은 시절이었다). 몇 번 길 찾기 연습을 한 나는 혼자 운전을 시작했다. 집은 방송국에서 한 30분 거리였는데, 시내에서 우리 집으로 가는 도로로 빠지기만 하면 거의 대부분 직진하는 경로였다. 문제는, 내겐 방향 감각도 없었단 것.


그날 밤, 동료들과 라디오 주차장에서 빠이빠이 하고, 예쁜 전등이 켜진 스토리 브릿지를 가로질러 시티로 가는 것 까지는 수월했다. 그러나 동쪽으로 가야 했던 내 차는 서쪽으로 한참 달리고 있었다. 어지간한 방향치인 나도 마침내 한두 번의 턴을 놓친 게 아니라 그냥 달릴수록 목적지에서 멀어지고 있단 사실을 알아차렸다. 일단 어딘가에 멈추려고 생각하며 (초보 운전자는 어디에서 멈춰야 하는지도 모른다) 텅 빈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신호가 바뀌질 않는 것이었다. 아무리 자정이 넘었다지만 이거 좀 이상한데? 하고 자세히 보니, 신호등이 반대쪽을 향하고 있었다..! 무슨 말이죠? 역주행을 하고 있었단 소리죠. 신호등 앞이 아니라 뒤에 서 있었단 소리죠. 아무리 한국에서 운전을 띄엄띄엄 했지만 습관이란 게 무섭더군요. 앞에 따라갈 차가 없으니까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부터 역주행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혼이 빠지게 놀란 나는 다른 차가 오기 전에 재빨리 유턴을 했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어느 공사장 같은 데 서서 (구)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그 역시 호주인이라 코 자고 있었지만 어쩌랴...


(구): ...(졸린 목소리) 여보세요...

나: 나.. 길 잃은 것 같다.

(구): 어딘데?  

나: 몰라... 무슨 공사장?

(구): 윽, 사유지 아냐?

나: 그런가?

(구): 일단 빨리 나와서 스트릿 이름이 나올 때까지 어디로든 운전해 봐.

나: 으음... (비포장 도로라 덜컹덜컹) 00 스트릿?

(구): (지도 책에서 스트리트 이름을 찾는다) 대체 왜 거기에 있는 거야?

나:... (할 말 없음)

(구):... 거기서 좌회전...

나: 응... 00 스트리트가 보여...

(구): 직진...


내비가 없던 옛날엔 이렇게 각 운전자가 지도 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맨 뒤에 색인란에서 스트리트 이름과 동네 이름을 찾으면 페이지 번호와 지도 내 좌표가 나오는...

이렇게 인간 내비게이터를 이용하여 낯익은 도로까지 온 나는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조차 없던 시절엔 대체 어떻게 방향을 찾은 걸까... 밤이라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대체... (핸즈 프리를 사용하지 않은 운전 중 통화는 금지다). 낯익은 길을 따라 직진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창문을 내리니 (영차영차) 공원과 산에서 풍겨오는 여름 밤의 향기가 상쾌했다. 그런데 집까지 5킬로 정도를 남긴 시점, 뒤에서 오던 차가 갑자기 지붕에 사이렌을 올리더니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경찰차: 앞 차, 정지. 정지.


네? 저요? 잠복 경찰이요? 11시쯤 시티를 떠나 당시 시간은 1시 반 정도. 그동안 내가 한 짓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며 등골이 서늘해졌다. 나는 즉시 길가에 차를 멈췄다. 주변은 깜깜하고 아무도 없었다. 사복 경찰들이 차에서 내려 내 차로 오는데 무슨 미드에서 본 FBI 콤비처럼 남자 한 명, 여자 한 명이었다. 가슴이 쪼그라들었다. 난 그때까지 호주 경찰과 얘기해 본 적도 없었다. 창문을 내리고 하.. 하이..? 하자, 경찰들이 굿 모닝, 한다. 아, 왠지 차 안에 앉은 내가 너무 건방진가? 하는 생각이 들어,


나: 어. 차에서 내릴까?

경찰: 노노노노, 그대로 차에 있어.

(토막 상식: 차에 있을 때 경찰이 부르면, 차 안에 있어야 합니다. 차에서 내려 경찰과 싸우려 하거나 총을 사용하는 인간들이 있기 때문에. 물론 경찰 말에는 절대 복종.)


나: 어... 그럼 제가 협조할 게 있나요?


오 신이여, 제가 오늘 밤 많은 악행을 저지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 언제부터 저를 미행하고 계셨던 건가요? 그 시점에 따라 나는...

면. 허. 정. 지.

네 글자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어떻게 딴 면헌데! 그러나 난 무슨 벌이든 달게 받아야 할 죄인이었다. 곧 경찰의 입이 열리고,


경찰: 너 아까 노란 불에서 왜 계속 갔어?

나: (아 신이여... 감사합니다) 어... 노란 불 봤는데 이미 정지선을 지나쳐서 그냥 계속 갔어...

경찰:... 다음에 또 그럴 거니.

나: 조심하겠습니다.

경찰: ...조심해라.


경찰님들은 내가 과하게 뉘우치는 듯했는지 다음엔 잘하라며 그냥 보내줬다. 으흑흑... 대사면을 받은 기분..! 눈물이 날 뻔했다. 앞으로 착하게 살겠습니다..! 똑바로 살겠습니다..! 


... 는 개뿔, 마음먹은 대로 고분고분 흘러가주지 않는 것이 인생. 

이후로도 8차선 도로에서 역주행 (황혼 무렵 갑자기 비가 몰아쳐 차도에 흐르면서 가로등 빛을 반사하는 바람에 차선이 보이지 않아 우회전 하면서 중앙선 넘어감), 중앙 분리대 넘어가기 (앞에서 차들이 오고 있는데 어떡함...), 동남쪽으로 가야 하는데 북서쪽으로 가기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던 친구: ??) 등등을 저지르며 아슬아슬 초보 시절을 넘어갔다. 웬만하면 클락션을 울리지 않고, 나 같은 불순분자가 도로에 있어도 당황하지 않았던 다른 운전자들에게 감사할 따름... 그래서 나도 웬만한 왕초보는 도로에서 마주쳐도 이해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감사하는 운전자 세 분이 있다. 그분들은 바로...!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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