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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니 Jan 05. 2016

A for Apple

서툰 외국어도, 그리움도, 고독도, 결국 익숙해진다.  

여름이 끈끈한 손을 거두고 맨 팔에 닿는 공기가 선선해지면 어김없이 추석 며칠 전이다. 시장에는 여름을 견디고 여문 과일들이 쌓여있다. 큼직큼직 차례용으로 잘생긴 것들이다. 그중 제일은 사과다. 배처럼 비싸지도 않고 밤처럼 번거롭지도 않은, 친절하고 맛 좋은 사과. 보통 집에서는 좋은 게 나오면 한 박스씩도 사서 서늘한 베란다나 김치 냉장고에 넣어놓고, 식후에 하나씩 꺼내 가족끼리 나눠 먹곤 했다. 과도로 통통 두드려 갈라 보면, 씨 쪽에  노란색이 유달리 진하다 못해 투명한 꿀빛으로 고인 놈들이 있는데 그런 건 꿀사과라고, 유난히 더 달고 맛있었다. 

 

사과는 식물학적으로 장미와 친척이라고 한다. 듣고 보면 사과 향은 장미와 비슷한 데가 있다. 장미는 꽃의 여왕이라는데, 어깨가 크고 둥그런 한국 사과는 여왕은 아니라도 엄마 같고 큰 딸 같은 그런 느낌이다. 아삭하고, 달콤하고, 향기로운 맛….

 

그런데 호주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과일이 바로 사과다. 호주 마트에서는 새빨갛고 각진 모양의 레드 딜리셔스, 단단해 보이는 녹색의 그래니 애플, 분홍색은 아니지만 약간 옅은 빨강의 핑크 레이디 등 여러 품종을 한 번에 판다. 한국 사과랑 맛이 가장 비슷한 것은 후지 사과다. 색깔도 크레파스로 붉은색, 주황색, 노란색을 죽죽 섞어 칠한 듯한 바로 그 색이다. 하지만 어떤 품종이든 하나같이 크기도 초라하고, 맛도 별로다. 가정에서는 식탁이나 테이블에 과일 바구니를  올려놓는 게 일반적이라 사과도 바나나 같은 열대 과일과 함께 실온에서 보관한다. 당연히 식감이 버석버석하다. 색깔도 왠지 흐리멍덩하다.

 

과수원을 하셨다는 시어머니께 여쭤보니 알 굵은 사과를 키우려면 일단 기후가 서늘해야 하고,  사과나무 사이 간격이나 가지 수 등을 정성 들여 관리해야 한다고 한다. 그럼 볼품없는 호주 사과는 날씨 탓인가, 돌보는 사람 탓인가. 그러고 보니 텔레비전에서 사과 한 알 한 알에  종이봉투를 씌우는 한국 과수원 모습을 본 게 생각났다. 한국에서는 애지중지 귀하게 보살피는 사과가 기후도 맞지 않는 이곳에 와 아무렇게나 다뤄진다는 생각에 왠지 안타까웠다. 

 

이곳의 크리스마스는 한국의 추석만큼 큰 명절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손자, 손녀들이 다 모여 일주일 정도 같이 지낸다. 하지만 여기 사는 많은 외국인들은 직계 가족끼리 휴일을 즐기거나 친구끼리 보낸다. 매년 가기엔 비행기 값이 만만치 않아 그렇다. 휴일 근무로 보너스 시급을 챙겨야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빠듯하게 용돈 벌이를 하며 유학 생활을 하는 동생 한 명이 매년 설날에는 비행기 삯을 모아 꼭 한국에 간다고 해서 이유를 물었더니, “집에 가서 나도 엄마 아빠 있고, 가족들한테 사랑받는 사람이란 걸 확인하고 오려고요. 여기서  천덕꾸러기 같이 지내다 보면 기죽으니까.”라고 한다. 이 친구는 사실 굉장히 귀염성이 있어 친구도 많은데 이런다.

 

외국생활은 신경 쓸 사람 없는 홀가분함도 주지만, 신경 써 주는 사람 없는 외로움도 준다. 그 외로움은 외국에서 산다는 사실이 아직 놀랍고 설레는 1-2년 째에는 느끼지 못한다. 3년쯤 되면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이야기해도 공감이 적어지고, 가족들도 내가 없는 것을 당연하게 느끼기 시작한다. 특히 명절이 되어 다른 사람들은 모두 집에 가고 나만 기숙사나 집에 혼자 남으면, 이 장소와 나 사이 마음의 거리가  더욱더 멀게 느껴진다. 문 밖을 나서면 곧 홍대 가는 지하철을 탈 수 있을 것 같은데, 창 밖을 보면 외국이다. 친구도, 가족도, 낯익은 동네 슈퍼 아저씨도 없다. 마치 땅에 굴러도 아무도 모르는 그런 볼품없는 사과가 된 것 같다. 물론 이런 감상은 여기 가족이 있는 사람들이나 어릴 때부터 여기에서 자란 사람들과는 또 다를 것이다.  

 

나같이 성장해서 온 사람들도 여러 부류다. 현지인과 결혼으로 온 사람, 자녀 교육을 위해 온 사람, 일로 온 사람, 다른 환경에서 살기 위해 온 사람… 성장 후 온 사람들은 영어가 원어민만큼 능숙하지 않아 원래 직업과는 다른  육체노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 대기업 부장이다가 청소부를 한다거나, 항공 기술자인데 육가공 공장에서 일하거나, 슬쩍 일본인인 척 스시 가게를 하는 경우도 흔하다. 선진국이라고 해서 이민 왔는데 막상 와 보니 부잣집에 더부살이하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결국 익숙해진다. 어떻게든 긍지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주변 공기에 쉽게 스며들지 않는 자신의 외국어에 익숙해지면서, 밥벌이를 하고, 자식을 학교에 보낸다.


추석인 오늘, 내 앞에는 애플파이가 놓여 있다. 송편은 구할 수가 없었지만, 설탕과 계피를 넉넉하게 뿌렸다. 

오븐을 예열한다. 사과를 얇게 저며 레몬주스와 설탕에 졸인다. 넓은 오븐 접시에 파이지를 깔고 사과편을 붓는다. 윗부분을 바구니 모양으로 정성스레 감싼다. 두꺼운 오븐 장갑을 끼고 파이를 오븐에 넣는다. 180도에서 20분. 땡. 뜨끈하고 달큰한 애플 파이는 한국 카페에서 먹는 것보다는 왠지 가정식이고, 호주 가정에서 만든 것보다는 왠지 한국식이다. 


길게 껍질을 깎아 낸 사과의 노란 과육을 생각한다. 작은 과일 포크로 찍었을 때의 소리, 튀기는 과즙도. 

하지만 나는 여기에 있다. 내 생활도 여기에 있다. 내가 선택한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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