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 5년차 쯤 일어난 일이다.
12월 31일, 여름.
덥고, 습하고, 약속도 없고...
아이와 집에서 뒹굴거리는데 옆 동네 친구가 전화했다. 약속 없으면 같이 밥 먹자고. 남편이 출장을 갔으니 애랑 같이 저녁 먹고 놀다가 자고 가라고 한다. 이 친구는 같은 동네 엄마로 마더스 그룹이라는, 비슷한 시기 출산한 동네 엄마들을 모아 육아 교육을 해주고 친목도 권장하는 정부 프로그램에서 만난 친구다. 덕분에 한 해의 마지막과 처음을 즐겁게 보낼 수 있겠군, 기뻐하며 차에 올랐다. 친구 집은 4 킬로 정도 떨어져 있어, 차로 가면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다.
빈 손으로 가긴 뭐 하니까 가는 길에 장을 봤다. 와인 한 병, 아이스크림, 과일, 주전부리... 엄마끼리 만나면 너무 즐겁다. 왜냐, 애들이 지네끼리 놀기 때문에... 어린아이에게 최고의 장난감은 게임기가 아니라 다른 생명이다. 그것도 작은 생명. 그와 함께 같이 놀고 싸우고 배우는 건 외동인 우리 애에겐 소중한 시간이다. 그 집엔 검은 조약돌이 파도 거품 아래 점점이 흩어진 듯 아름다운 털을 가진 착한 개도 한 마리, 까다롭지만 인내심 있는 고양이 할머니들도 두 분 계시니, 정말 최고다. 아이들이 노는 동안 비슷한 화제가 있는 성인끼리 이야기하는 시간은 또 얼마나 소중한지! 육아의 사소하고 돌아버릴 듯한 에피소드들을 공유할 수 있는 동지들 말이다.
쇼핑한 걸 차에 싣고 콧노래를 부르며 친구네 집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뒷 차가 빠앙! 경적을 울렸다. 으악, 뒷자리의 애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백미러로 확인하니 터프해 보이는 픽업트럭이었는데, 창문 밖으로 털이 부숭부숭한 팔이 나와 있었다. 매일 운전을 해도 경적 소리를 듣는 일은 한 달에 한 번도 안 되는데, 연말이라 다들 놀러를 나갔는지 동네 도로엔 차가 나랑 그 차 밖에 없었으므로 분명 그 경적은 나를 향한 것이었다. 왜 그러지? 설마 파란불로 신호가 바뀌었는데 약간 늦게 출발해서? 아무리 생각해도 그 외에 내가 잘못한 건 없었다. 거 참, 진짜 성격 급하네. 이상한 사람인가? 혹시 연말이라고 벌써 어디서 뭔가 들이킨 수상한 사람은 아니겠지? 찝찝한 마음으로 계속 운전하는데, 이 차는 다른 텅 빈 차선들은 다 놔두고 내 뒤를 계속 따라오더니 좌회전까지 같이 하는 게 아닌가? 친구 집은 약간 산 쪽에 있는 한적한 주택가라 이쪽으로 방향을 틀 일이 거의 없는데? 우연...이지? 그런데 이 차가 나한테 하이빔을 깜빡깜빡 쏘더니 잠깐 멈추라고 소리를 치는 거다. 길거리엔 아무도 없고, 뒷자리 카시트엔 아장거리는 어린아이가 매여 있는 상황. 시간은 오후 다섯 시쯤. 어쩌지? 위험한 동네는 아니었지만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던지라, 좀... 쫄렸다. 선빵? 옛 성현의 말씀대로 선빵만이 답인가?
어쨌든 차를 세우고 운전대를 잡은 채로 What's up? (무슨 일이야) 하고 뒤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어깨가 건장한 중키의 남자 둘이 차에서 내리더니 이 쪽으로 왔다. 선빵이고 뭐고 여차하면 바로 엑셀 밟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들의 말,
"너... 니 바퀴 펑크 난 거 알고 있어?"
"엥?"
확인하니 뒷바퀴에 대못이 박혀 있었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사실 쇼핑센터 들어가기 조금 전부터 차가 조금 기울어진 거 같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눈으로 보니 타이어 모양이 확연히 망그러져 있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두 남자는 형제라고 했다. 일찍 독립해서 형은 이 동네에서, 동생은 브리즈번에서 세 시간 정도 걸리는 곳에서 일하고 있는데, 연말을 맞아 동생이 놀러 왔다고. 형은 동생을 픽업해 오다가 바퀴가 터진 줄도 모르고 가는 우릴 발견해 쫓아와 준 것이다. 그들은 스페어타이어 있냐, 타이어 교체하는 잭은 있냐 묻더니, 친절하게도 그 자리에서 자기네가 타이어를 교체해 주겠다고 했다. 아니, 이런 인심 좋은 사람들이 있나..!
형제들은 자기네 차에서 잭을 꺼내 와서 내 차 밑에 고정하고, 차체를 들어 올린 후, 대못이 박힌 타이어를 빼고, 내 트렁크에서 영차, 스페어 타이어를 꺼냈는데, (타이어란 게 생각보다 무겁다),
그 타이어도 바람이 빠져있었다.
입술을 깨무는 나와 달리 형제들은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하더니, 저쪽 주유소에서 바람 넣어 올게, 하곤 휭 사라졌다. 난 정말 미안하고 고마워서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그런데 잠시 후, 그들이 침통한 얼굴로 돌아와 하는 말,
근데 이 타이어도 펑크가 나 있는데?
앗차...
깜빡했다. 백만 년 전 (구) 남편이 펑크를 낸 후 수리한다고 해놓고 한참 방치했다. 기다리다 못해 그냥 새 타이어 사야지, 하고 가게에 갔는데, 타이어라는 게 그렇게 비싼지 처음 알았지 뭐야. 갈려면 네 개 다 같이 갈라는 말도 들었는데, 그때 당시는 돈도 없고 그래서 미루고 미루다 깜빡, 잊고 있었다. 막 이혼한 후의 일이다.
날씨는 덥고, 트렁크의 아이스크림은 녹아가고, 친구한테는 아까 늦는다 전화를 했다. 카시트에서 기다리던 애는 지루해하며 인도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친구네 집까지 걸어갈 수도 없고, 차도 걱정되고, 아무래도 그냥 집에 가야 되는 상황. 집에 간다고 뾰족한 수가 생기는 건 아니었다. 생활권이 운전자 기준인 이곳 상황상, 차 없이는 슈퍼 가기도 힘드니 꼼짝없이 애랑 집에 갇힐 것이었다. 아, 타이어 가게까진 또 어떻게 가지? 견인을 해야 하나... 견인 엄청 비쌀텐데... 택시? 어쨌든 오늘은 이미 모든 곳이 문을 닫았고, 내일은 공휴일이었다. 낭패다. 갑자기 부아가 솟는다. 대체 왜 도로에 대못 같은 게 막 있고, 그걸 왜 또 하필 내가, 그것도 공휴일 전 날 밟은 거냐고, 하필 남들은 다 즐겁게 노는 날...!? 세상에 "하필 내게 이런 일이" 라는 상이 있다면 나는 매년 레드 카펫 감이다. 생각치도 못한 일이 도로변의 대못처럼 불쑥 나타나 내 인생의 타이어를 푹 찌른다. 급변을 시작했는데 휴지가 없거나, 복사하러 가면 종이가 떨어지는 인간이 바로 나다. (그보다 심각하고 운명적인 일들은 생략한다.) 나는 어딘가 어두운 통로에 이어진 끝없는 선반을 생각한다. 그 위에는 내가 수상한 크고 작은 "하필" 상 트로피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아아, 눈부셔....
이렇게 플래시백, 막막함, 대상 없는 억울함, 일반화 등을 잠시 망상으로 처리한 후, 나는 청년들에게 헛수고를 하게 한 걸 사과하며, 겸연쩍게 이 타이어로도 집까지 5분 정도는 갈 수 있겠지...? 물었다. 그런데 세상에, 형이 말하길, 자기 집에 타이어 수리하는 기계가 있는데, 그걸 가져와 타이어 터진 곳을 봉합하면 이틀 정도는 간다고, 그럼 공휴일이 끝나니 그때 타이어를 사러 가면 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저기 잠깐만요,
당신들은 흙이 아니라 친절의 가루로 빚어진 인간입니까?
어떻게 모르는 사람에게 이렇게 잘해 줄 수가 있어?
아니, 진짜 근데 너무, 하, 어쩌지. 너어무 감사하다 못해 지인짜 죄송하지만 도움이 너무나 필요한 상황이라... 넙죽 절하고 일단 아이스크림 두 통을 형제님들께 바쳤다. 형제님들은 하하 웃으면서 집 가깝다고,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고는, 진짜로 기계를 가져와서 타이어를 고치고, 고친 타이어에 바람을 넣고, 그걸 차에 설치해 준 후 못 박힌 타이어를 트렁크에 넣어 주고는, 해피 뉴 이어! 를 외치며 경쾌하게 저 쪽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들이 탄 픽업트럭은 점점 떠올라... 천국으로 날아갔다고 한다...
...아니면, 말이 안되잖아요,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게?
된다.
긴긴 선반 위 수많은 하필 상 트로피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기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 그것은 이 지상에 선의를 가진 사람이 분명히, 그리고 많이 존재한다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의 단단한 증거다. 천사 형제들 외에도 또 한 분, 나의 "하필" 트로피에 아로새겨진 잊을 수 없는 분이 기억난다. 그 분은 50대 중반쯤의 여성 운전자셨는데,
그 이야기는 또 다음 화에... :)
여담:
한편 10분 거리에 사는 친구는 우리를 세 시간쯤 기다려야 했습니다. 미안해... (그리고 그는 나에게 몇 번쯤 더 비슷한 일을 당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배움이 빠른 그는 내 차를 탈 땐 방향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안전 운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