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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니 Apr 09. 2021

술 잘 사는 예쁜 언니들

비 오는 날의 기억

학교에서 길 건너 골목길엔 oo이란 전통주점이 있었는데 그곳엔 선배인 J 언니께서 알바를 하고 계셨다. 언니는 빠른 년생이라 따지면 나와 동갑이고 본인도 말을 놓으라 몇 년에 걸쳐 다회 말씀하셨으나 그간 언니가 낸 술값을 생각하면 인간의 탈을 쓰고 그럴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 땐 칫솔에서 술냄새가 날 정도로 마셨기 때문에...



언니가 그곳에서 알바를 하고 있는 덕에 기분이 꿀꿀할 때면 언제든 거기에 갈 수 있었다. 혼자 마시면서 일기장을 끄적대고 있으면 알바 시간이 끝난 언니가 바로 조인! 물론 술과 안주를 쐈고 가끔 사장 이모님께서 조인하셔서 차를 드시기도 했다. (그곳은 사실 다원이기도 했다.) 여하튼 천 차렴을 왔다 갔다 하던 언니와 이모님이 직접 쓰신 듯한 서예 연습지로 바른 벽, 그리고 가장 저렴한 안주였던 약간 밍밍한 김치 부침개(이천오백원) 는 비오는 날 종종 생각나는 추억이다.



이 곳은 4인 테이블이 총 6개에 8명 정도 들어가는 온돌 좌석 하나 정도라 많은 친구들하고 갈 수는 없었다. 그냥 친한 친구 한 두 명이랑 앉아서 아무 얘기나 하면 그만이었다. 게임 같은 거 할 필요도 없고. 안주가 떨어지면 무한 리필 되는 신 김치에 쌉쌀한 흑주를 곁들여 양심이 도저히 견디기 어려울 때까지만 더 앉아있다 나와도 됐다. 닭똥집 볶음도 여기서 처음 먹어 봤는데 여기 말고는 아무데서도 먹은 적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닭똥집 하면 항상 이 곳의 맛을 기억으로 더듬곤 한다. 그리고 마치 내가 전생에 목숨이라도 구해 준 양 기어코 술값을 계산했던 언니를 생각한다.



비록 스무살 언저리 밖에 안된 어린 성인들이 선후배라며 한 쪽은 주었고 한 쪽은 받았지만, 우습게 생각되지 않는 건 양쪽이 모두 순수했으니까 그랬던 게 아닐까. 맘에 안드는 파벌 흉보려고, 또는 모종의 흑심으로 술을 샀던 수 많은 남자 선배들이 전혀 그립지 않은 이유도 마찬가지고. 그러고보면 그렇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술과 밥을 아낌없이 사 준 언니들이 내 인생에 많았던 게 참 감사하다. 난 마음이 가난하여 이때껏 뭘 잘 사주는 선배가 된 적이 없는데...



J 언니와 나는 그 대학 몇년 후 각각 다른 말을 쓰는 타국으로 떠돌며 가끔 메신저로만 한 두시간 씩 이야기 하곤 하는데 여튼 이렇게 비가 오는 쌀쌀한 밤엔 나오라고 하면 나가 노란 등 아래 아무 얘기나 하던 시절이 그립다. 그 때 그 곳엔 그렇게 김광석 노래가 많이 흘렀었다. '조금씩 멀어져 간다...'



그래도 술 먹을 때마다 생각나면, 또 그렇게 먼 건 아니죠. 마흔 즈음엔 그리움도 참 소중하더이다. 이 글을 쓰다가 결국 집 앞 수퍼에서 맥주 한 병을 사왔는데, 지금 몸 관리 하느라 술 끊은 언니를 위해 건배. 그리고 술 잘 사주고 예뻤던 나의 모든 언니들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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